1
지난주 화요일 저녁, 나는 위스키 한 병을 들고 클락을 찾아갔다가 가게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보슬비가 먼지처럼 흩날리고 거리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조금이라도 불빛이 새어 나오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시간대였지만 안은 지나치게 깜깜했다.
나는 한동안 닫힌 가게 앞을 기웃거렸다. 녹슬기 시작한 자물쇠가 걸린 나무 문은 폐쇄적이고 억센 느낌을 주었다. 보통 그가 문을 닫을 때 걸어놓는 ‘CLOSE’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개인 사정을 고지하는 간결한 메모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클락이 그런 걸 남겨둘 리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까치발을 들고 2층 창문까지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클락은 정말로 가게에 없었다. 다음 순간 맥이 탁 하고 풀리면서 가게로 향하는 내내 들고 있던 위스키가 뒤늦게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또 어딜 간 거야?’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문 앞에 ‘CLOSE’ 간판이 걸려 있었고, 가게 안쪽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클락이 가게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덕분에 그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불쑥 클락이 나타났고 나는 문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크기나 냄새 따위로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러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부러 능청스럽게 말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네가 손님이냐?”
그는 낄낄거리면서 내 오른편으로 손을 뻗었고 나는 옆으로 조금 비켜서서 그가 자물쇠를 푸는 걸 지켜보았다.
가끔 가게 불이 전부 꺼진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멀리 갔다는 뜻이고 당분간 자리를 비운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 날에는 나도 굳이 헛걸음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부터 그가 조만간 어디를 다녀와야겠다고 말을 흘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며칠간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클락이 어디를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하거나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얘기한 것이 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기억 속의 클락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만약 클락이 무언가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했다면 지나치게 빙 돌려 말했어도 나는 확실하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별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클락은 원래부터가 좀 그런 구석이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가도 제멋대로 굴었고 선을 확실하게 그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나는 코트 안쪽으로 위스키를 감춘 채 한기를 느끼며 챌코트로 돌아왔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거리는 벌써부터 한밤중 같았고 인적도 드물었다. 나는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위스키를 감싸고 있던 포장지를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나온 것이 떠올랐다. 나는 우산 대신 팔뚝만 한 술병을 한 손에 움켜쥐고 곧장 거리로 나올 만큼 들떠 있던 것이다. 가게 문이 닫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시간에 혼자 집으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푼수같이 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지루해서 그래. 사는 게 지루해서.’
요즘 들어 내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니며 쇼핑을 하거나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화장대 앞에서 얼굴을 가다듬는 것밖에 없었다. 가끔 옛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몹시 힘들었다. 삶에 동력이나 영감을 주는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갈 땐 즐거움을 꾸며내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면 얼마든지 명랑한 태도와 말투를 꾸며낼 수 있었지만 편지를 쓸 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만사가 재미없어서 힘이 들었다.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부족함이 없는 지금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내가 진실로 원하는 건 절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는 게 그렇다.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하길 바라지만 결국 냉혹한 현실에 불평만 해댄다. 모두들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요란하게 파티를 열고 춤을 추고 배우자를 속이면서 외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일이 끝나면 술집으로 달려가고 길거리의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것이다. 지루함은 삶의 독이다. 지루함은 생기를 빼앗고 의지를 지배하는 힘이다.
혼자서 빌라로 돌아가고 있는 나에게도 지루함이 엄습했다. 차라리 아무 일이라도 벌어져서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싶었다. 길가는 남자에게 시비가 걸리거나 칼을 든 미친 여자에게 재수 없게 잘못 걸리는 바람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하며 거리 위를 빙글빙글 돌고 싶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길 바라면서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두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행인 실루엣이라도 보이면 눈을 반짝이며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제아무리 챌코트라고 할지라도 어둠이 내려앉으면 사람들은 귀신같이 종적을 감추었고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금세 실망해서 두리번거리기를 멈추었다. 그러다 빌라 현관에 도착하고 말았다.
나는 머리카락에 붙은 물기를 털어내면서 품속에 감추어두었던 위스키를 꺼내 계단 위에 올려놓았다. 열쇠를 찾아 코트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가는 가볍고 빠른 발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문이 쾅 닫혔다. 빌라 아래층에 사는 꼬맹이 남자애인 듯했다. 나는 지루한 표정으로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거실에는 내가 아무렇게나 뜯어버린 포장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굵어진 빗줄기가 침범해서 발코니 근처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나는 위스키를 테이블에 얹어놓고 바닥을 대충 닦은 뒤 커튼을 걷었다. 혼자 풍경을 보면서 위스키를 몽땅 해치울 생각이었지만 글라스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그럴 마음이 사라진 뒤였다. 글라스 주둥이에 손끝을 올려놓고 아슬아슬하게 잔을 흔들면서 나의 변덕이 끝나길 기다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혼자서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언제 돌아오려나? 사흘?’
보통 클락은 그 정도로 자리를 비웠던 것 같다. 빠르면 다음 날 돌아오기도 했다. 언제 떠났을까? 어제 떠난 거라면 내일은 돌아와 있을지도. 하여간 넉넉잡아 사흘 뒤에나 찾아가 보면 될 듯싶었다. 나는 어둡고 고독한 거리 위로 불투명하게 반사되는 나의 권태로운 표정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면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야겠다. 성질을 조금 부리면서. 좋은 위스키를 사흘이나 아꼈다고 투덜거리면서. 헛걸음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지라고 불평하면서 말이다. 글라스를 도로 찬장에 넣어두며 그런 생각을 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2
사흘 뒤 나는 조금 이른 점심시간에 다시 외출했다. 이번에는 포장지에 제대로 싼 위스키 한 병을 든 채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클락의 가게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안내문은커녕 ‘CLOSE’ 간판조차 달리지 않은 나무 문과 굳게 잠긴 자물쇠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응시하던 나는 맥이 빠진 채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마차를 잡았다.
마차는 템스 강 서쪽을 빙 둘러 이동했다. 희뿌연 안개가 강 주변으로 포말을 일으키며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또 뭘 하며 시간을 보내지? 돌이켜보면 나는 지루함을 견딜 수 없을 때마다 클락을 찾아갔다. 클락과 친구가 되기 전에는―어쨌든 나는 그를 친구라고 생각했다―저녁때까지 술을 마시고, 아무 남자나 만나서 밤새 섹스를 하거나 그 비슷한 걸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상황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때로는 오히려 그런 행위야말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부표를 조금씩 수평선으로 떠미는 파도처럼 나를 지루함으로 떠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지루해졌다. 나는 모델 일을 잘했지만, 그렇다고 그 일을 좋아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체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시시해지고 만 것일까. 그러나 안개 싸인 템스 강 주변으로 늘어진 버드나무를 바라보는 한편으로, 나는 원래부터 내게 그런 구석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인생을 하잘것없고 시시한 것으로, 견뎌야만 하는 장애물이 끝없이 등장하는 성경의 한 구절로 취급해온 소녀가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버드나무 가지는 단단하고 나뭇잎이 큼지막한 스프링필드 앞마당에 늘어진 나뭇가지로 변했고 소녀는 그 위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이미 다 큰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건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인생에는 나를 시험하는 일만이 존재할 거라고밖에 생각되질 않았다. 스프링필드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오로지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지나치게 영리하고 똑똑한 나머지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잔인하고 불합리한 세상사를 깨닫고 만 것이었다. 나는 삶의 장애물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는 미래를 꿰뚫어보는 아이였다. 은밀하게 전능한 아이였다.
또래 아이들이며 세상만사도 전부 시시하고 재미없었다. 아니,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애써 모든 걸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취급하면서 그들 모두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뿐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전능하거나 영리한 아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단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모 밑에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글을 조금 쓰고 읽을 줄 알고 생각하는 척을 잘 하는 계집아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느라 깊게 상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신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지나치게 의연하게 구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당시 스프링필드 고아원에 있던 대다수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분노와 혼란과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나름대로의 태도를 습득했던 것을 기억한다.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많았고 만사에 겁을 먹거나 지나치게 말수가 적은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아무렇지 않기로 결심한 아이였다. 혼란한 환경 속에서 나는 결단코 이 비통과 고통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고 끝까지 그 결심을 지켰다. 나와 같은 결심을 한 아이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클락도 그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 그 애에게 관심이 없었다. 내 눈에 클락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 보였다. 그가 조금 특별한 아이처럼 보일 때가 있기는 했다. 고아원을 뒤집을 만한 기막힌 장난거리가 떠오르면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반짝이곤 아무렇지 않은 척 재빨리 표정을 바꿨는데, 당시에는 앞으로의 일을 위해 순발력 있게 자신의 충동이나 욕망을 감추는 행동이 다른 아이들에게서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조숙한 인내심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눈에 그 능력을 알아보았다. 나에게도 있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와선 우리가 가진 그것을 능력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클락이 언제부터 스프링필드에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나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동갑이었는데, 그 나이대 이성 간 관계가 보통 그렇듯이 절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마 말썽을 피우는 그에게 내가 일방적으로 신경질을 내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내 성질을 맞받아치고 다른 말썽을 피우러 떠나는 일이 몇 번 정도는 있었을 법하다.
클락은 고아원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였고 나는 무기력한 괴짜였다. 그가 고아원 곳곳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영토를 넓히는 동안 나는 나만의 가지 위에서 거드름을 피워댔다. 기억하는 건 우리가 서로를 충분히 탐색할 수 있을 정도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게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고, 그 무렵 나나 클락은 남들은 물론이고 스스로마저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게 두려움을 감추는 아이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클락이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심드렁한 투로 내게 질문을 던졌던 어느 오후의 일을 기억한다. 나나 클락이 스프링필드에 들어온 지 적어도 삼사 년은 흘렀을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나뭇가지에 몸을 반쯤 늘어뜨린 채 두껍고 어려운 소설―아마도 <위대한 유산>이었으리라―을 거꾸로 든 줄도 모르고 읽는 척하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클락이 내 머리 위에 매달려 있었다. 그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잎사귀들이 페이지 위로 잔뜩 떨어졌다.
“재미있냐?”
“재미없어.”
나는 서두르지 않고 페이지 위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털어내면서 대답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이 어떻게 재미있겠어? 이런 걸 재밌게 읽을 수 있다면 분명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거야….”
“재미없는데 왜 그러고 있어? 케니, 넌 제정신인 사람이잖아.”
“난 나이가 많아서 고아원을 찾아온 어른들이 얄밉게도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하곤 한단 말이야… 그럴 때 아는 척 할 수 있도록 어려운 단어 몇 개만 기억하는 것뿐이야.”
“그 자식들에게 잘 보여서 뭐가 좋다고. 나를 봐, 처음부터 모른다고 했더니 이제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고.”
나뭇가지에 두 다리를 단단히 고정시킨 클락이 거꾸로 돌면서 그네를 타듯 몸을 흔들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에게 희미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도 그때 나의 무의식은 클락의 ‘귀찮게’를 나의 ‘얄밉게도’와 연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비꼬았고 그는 빈정거렸는데, 그것은 전부 어른들의 행위나 능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단호하게 주변을 배척하는 단어를 선택하는 클락의 안목에서 더는 어른들이 원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대한 상처 받은 결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른을 향한 적대감 속에서 희미하게 클락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 무렵 나는 무기력하게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는데,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돌이켜보면 클락은 늘 그런 식이었다. 참을 땐 놀랄 만큼 인내심 있었지만, 그게 아닐 땐 사방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상대방을 분노로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정말로 화가 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건 자기 자신인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를 대할 때면 조금 우쭐한 것 같다.
“넌 작가가 될 거냐?”
클락이 물었다.
“음, 글쎄…. 앞날은 모르는 거지만 성실하게 글을 쓰는 것도 아니라서… 별로 되고 싶은 건 없어.”
“단어까지 찾아보고,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 의외네.”
“그렇지? 재미있는 건 나라도 열심히 하더라고.”
나는 나뭇가지에 몸을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넌 내 소설에 관심 없니?”
“난 네 거 못 읽어. 쉬운 글자로만 쓰여 있지도 않고, 읽을 줄 모르니 딱히 관심도 없지. 야한 걸 굳이 읽어야 아냐?”
“글을 읽을 줄 모르면 읽어줄 수도 있어. 내 수입원의 일원이 되어주지 않을래?”
“읽어달라고 하면 추가금 붙는 거 아냐?”
클락이 나무에서 뛰어내린 다음 나를 올려다보았다.
“좀 궁금하긴 한데. 애들 사이에 인기가 좋더라고.”
그런 다음 우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고, 다음 날 내가 삼십 페이지짜리 야한 소설을 들고 그를 찾아가면서부터 십삼 년 뒤인 어느 날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이어질 우리의 길고 긴 대화가 시작되었다.
가끔 나는 궁금해한다. 그때 나는 약해 보였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무의식중에 그의 두려움을 감지했던 나처럼 클락 역시 나의 두려움을 알아차렸을까?
그것을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더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기에 우리는 지나치게 어른이 되어버렸다. 신중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위험한 주제를 구분하고 대화하는 데 너무 익숙해졌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는 척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묘해지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두 가지 언어로 얘기했다. 아이들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놀랄 만큼 잘 알고, 그 사실을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생각은 그것만큼 빠르지 않다. 생각은, 생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글을 쓰고 읽을 때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전까지 생각은 미지의 영역에서 욕망과 실타래처럼 엉겨 붙은 혼돈에 불과하다. 아이들의 요청은 설령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라도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고파.” “외로워.” “좋아.” “상처야.” “그래서 너무 힘들어.”에 모든 게 담겨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프링필드 시절, 나는 우리들 모두가 바로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향한 우리의 시도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떠오르는 단어나 어조 중에서 요청에 가장 걸맞다고 여겨지는 것을 간신히 ‘선택’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느껴졌다.
단어에 감추어진 의미의 세계를 정복하고 자유롭게 말하는 능력은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고른 단어들은 너무도 단순한 나머지 일부러 날카롭고 성가시게 굴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도 결국 우리가 생각으로 정복하지 못한 혼돈의 덩어리까지 보여주고 말았다. 우리의 말 이면에는 항상 붙잡히지 않은 세계가 남아있었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아이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파악하고 인정할 때와 같이 강인하고 순수한 감각으로 그게 거기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를 입양하려고 찾아오는 어른들의 몸과 얼굴에 흐르는 분위기와 원장실에서 새어 나오는 탄식과 말소리로 모든 일이 벌어지기도 전부터 미래를 예감하고 가슴을 졸이거나 기대하는 것처럼.
나는 내가 쓰는 단어들이 싫었다. 누구나가 곧장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하고 단순한 단어들은 얇고 볼품없는 스웨터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쉬운 단어를 선택하는 건 나를 무방비하게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 나의 두려움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엄폐’ ‘흡착’ ‘유동성’ ‘즉발’ 같은 단어들이 좋았다. 그런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면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했고 그 모습은 내게 자신감과 만족감을 주었다. 나는 어른들이 그러는 것처럼 카드 안쪽에 존재하는 진실을 감추고 반대쪽 한 면만을 보여주는 능력을 키워나가고 싶었다.
그 무렵 나에게 있어 어려운 책을 읽는 척하거나 복잡한 룰의 카드게임을 하거나 금기나 다름없는 음란한 소재로 소설을 쓰는 일은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난 굉장히 뻔뻔하고 오만하게 그 일들을 실행했고 나의 성취를 아이들에게 가감 없이 드러냈다. 클락에게 야한 소설을 읽어주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나는 그렇게 뻔뻔스러웠으리라.
다음 날 점심시간에 나는 공책 한 권을 감춘 채 식당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태연한 얼굴로 식탁을 한 번 훑어본 다음, 자연스러운 태도로 클락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기억이 맞다면 내가 그의 바로 옆에서 점심을 먹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내가 의자를 끌고 곁에 앉는 동안 클락 역시 그 뻔뻔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을 보면서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연장자였던, 이성 간 붙어 있으면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있을 거라는 기대와 감시를 받는 나이 대에 속했던 우리가 아이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있던 건 우리가 보여준 그 태연함 덕분이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행동하면서 아이들을 속이는 데에 도가 터 있었다. 훗날 어른이 된 우리가 습관보다 자주 사용하는 그러한 태도가 그날에도 무척이나 유용하게 쓰였다.
점심을 마친 뒤 우리는 서로 모른 체하며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걷다가, 마당으로 빠져나와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도착하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비로소 가까이 붙었다. 클락은 초콜릿 쿠키를 꺼냈고 나는 공책을 보여주었다.
“음… 30페이지짜리야. 내 첫 작품이지. 초심자 용이라서 쉬울 거야.”
“초심자라니, 날 너무 얕보는 거 아냐?”
클락은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마당에 거리낌 없이 배를 붙인 채 엎드렸다. 점심 무렵의 따뜻한 햇살과 고아원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 작은 발들이 우다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서서히 인식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났다.
나긋나긋한 투로 내가 쓴 발칙한 소설을 읽어주는 내내 나는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가 부끄러워하는지, 내가 선택한 단어에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 나의 능력이 클락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유효한지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땐 내가 클락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아이들 특유의 기민한 감각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선 그가 도통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고아원에서 내 적수가 될 만한 아이는 없다고 자신해왔는데, 클락의 존재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클락이 내가 쓴 문장에 기가 죽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사실 때문에 그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날이 섰다. 내심 그가 시시한 아이가 되어주길 바랐던 나는 결국 눈을 가늘게 뜨고 볼멘소리를 하고 말았다.
“클락은 눈치는 빠르면서 상냥하지는 않구나.”
이 장면은 언제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흐린 날의 일몰처럼 빠르고 고요히 흘러간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나의 시선을 맞받아친다. 클락의 얼굴 위로 점점 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칭찬 고마워. 나는 지는 걸 싫어하고, 상냥하지도 않지.”
나는 그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너도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안 그래?”
기억 속의 나는 매번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 차갑게 대꾸한다.
“그럴 리가.”
그러나 거짓말이란 것을 클락도 안다.
나는 사우스워크를 통과해 덜리치로 이어지는 골목에 마차를 세웠다. 걷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빌라와 멀리 떨어진 곳까지 빙 돌아온 것이었지만 막상 거리에 들어서자 신고 있는 구두며 옷이 오래 걷기에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씩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손에는 여전히 위스키가 들려 있었다.
걸을 때마다 위스키의 무게가 오른쪽 손목에 추처럼 매달렸다. 심지어 이놈의 술병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클락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심심할 때마다 충동적으로 얼빠진 짓을 하는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지만 나는 멋대로 자리를 비운 그에게 책임을 돌리기로 했다.
도로 위로 나뭇잎이 뒹굴고 있었다. 가을을 앞둔 런던의 날씨는 늘 그렇듯 흐리고 습윤해서 꼭 물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반쯤은 생각에 잠긴 채, 또 반쯤은 눈앞의 풍경에 곤두선 채로 걸었다. 챌코트처럼 이 근방도 개발이니 뭐니 하면서 건물을 짓고 있었고, 그 때문에 비계와 건설 도구가 어수선하게 바닥에 널려 있었다.
혹시 다른 일을 하러 갔나?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어느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클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보았다. 원래도 그는 혼자서 지붕을 고치고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곤 했다. 그런 일에 도통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그가 원래부터 그런 데에 일가견이 있는 건지, 아니면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익힌 능력인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점심부터 잡화점에 눌러 앉아있는 날이면 클락은 내가 손님을 쫓아낸다고 투덜거리면서 끊임없이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사실 재미있었다. 클락의 행동에는 조리가 있었다. 그는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거나 결정할 땐 반드시 계획과 목적이 있었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도 속으로 다음 일을 염두했다. 나처럼 충동적으로 집과 반대편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거나, 느닷없이 불꽃놀이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재료를 들고 들이닥치는 일 같은 건 그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일 것이다.
나는 평소에는 조리 있고 똑 부러지게 행동했지만 때로는 혼잣말을 했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면서 돌발 상황을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고 또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부자재가 잔뜩 들어 있는 상자를 품에 안고 잡화점에 들이닥쳐 불꽃놀이를 만들자고 했을 때도 나는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제 우린 공범이야.”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클락이 다가왔다.
“또 신났네. 뭐야?”
그는 상자를 한 번 들춰보곤 어이없어했다.
“비가 오는 날엔 안 돼.”
“아직 그렇게 많이 오지도 않는데 뭐 어때?”
“왜 하필 오늘인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클락은 상자를 창고로 옮겨놓았다.
그날 우리는 어두침침한 창고에 처박혀서 화약을 제조했다. 나는 그를 부추기며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보라색 불꽃이나 혜성처럼 꼬리가 긴 불꽃들에 대한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다가 언젠가 클락이 말해줬던 폭죽 이야기까지 꺼냈다.
“낮게 주변을 휙 돌았다가 펄쩍펄쩍 뛰고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은 못 만들어?”
“너 내가 무슨 화약제조 전문가라도 되는 줄 알아?”
“못 해?”
“되겠냐.”
그런데도 우리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클락과 나는 시험 삼아 작은 규모의, 요컨대 손에 들고 잠시간 서 있을 수 있는 촛불 같은 화약을 만들었다. 그런데 폭죽은 불이 붙은 동안에 어리둥절한 것처럼 쉿쉿 거리며 멈추어 있는가 싶더니, 곧이어 바람을 날카롭게 쌩하고 가르면서 지붕을 뚫고 솟구쳐 버렸다.
지붕 너머로 작은 굉음과 함께 우리가 만든 폭죽이 공중분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우리는 얼빠진 얼굴로 천장에 난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폭죽에서 파편처럼 떨어져 나온 불씨가 천장 한구석에 붙은 걸 보고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클락은 양동이를 가지고 오려고 했고 나는 사다리를 들고 오려고 했다. 그런데 중간에 엇박자가 나면서 완전히 엉켜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의 무릎 위로 엎어지는 바람에 덩달아 클락도 넘어졌다. 양동이가 바닥을 구르고 사다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잠시간 우리는 엉겨 붙은 채로 주저앉아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무릎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지금의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은 클락이 절대 반가워하지 않을 일이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그런 일.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를 내 흥에 끌어들였다. 이 정도로 귀찮게 하는 건 절대로 봐주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클락의 표정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천장에서 빗방울이 뚝 하고 떨어지면서 주의를 분산시켰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천장의 상황을 확인했다. 불씨가 완전히 전소되는 동안 빗방울이 쉴 새 없이 귓바퀴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급한 일이 얼결에 마무리될 때 오는 맥 빠진 감각이 한차례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클락은 재를 뒤집어쓴 채 어이없다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고 뺨이 새까맣게 얼룩져, 잿빛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도 비슷한 꼴이었으리라. 그래서는 안 됐는데, 결국 나는 참지 못했다.
나는 폭소하기 시작했다.
“너, 얼굴이….”
나는 그의 다리를 때리며 웃어댔다. 몸을 젖히면서 웃다가, 클락에게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너무 웃는 바람에 다시 무릎 위로 엎어지고 만 채로 또 웃어댔다. 일이 그렇게 되자 클락도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너만 하겠냐?”
한동안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웃어댔다.
나는 빗물 때문에 뺨을 타고 서서히 흘러내리는 재를 손등으로 닦아낸 뒤, 그의 무릎이 의자 팔걸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팔과 얼굴을 기대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비가 오는 날이라서 다행이지?”
클락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 말고 시선을 흘겼다.
“나 참….”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머리카락을 정돈했고 그는 엎어진 양동이와 사다리를 주워들었다. 클락이 천장 아래에 양동이를 대고 사다리를 옆구리에 끼운 채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그의 코트를 걸쳤다.
밖으로 나왔을 땐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사다리를 붙잡은 채 클락이 지붕 너머로 사라졌다가 되돌아오는 걸 지켜보았다. 빗소리 틈으로 그가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다리 아래에서 나는 생각했다.
‘클락은 언제 처음 지붕을 고쳐봤을까? 이 잡화점의 모든 건 클락의 손길을 거쳐 수리되고 있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잡화점은 언제부터 열었을까? 왜 하필 잡화점? 잡화점을 열 돈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잡화점을 열기 전까진 뭐하고 지냈을까?’
그러고 보면 클락에게 그런 것들을 물어본 적 없었다. 나 역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락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내가 말도 없이 지나칠 정도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사다리를 접던 클락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것처럼 내 시선을 받아쳤다.
“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주전자에 물 올릴 거면 레몬티로 부탁해.”
그는 내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힌 듯했다.
“너 이거 영업방해야. 알아?”
“알지, 알지.”
그러면서도 클락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사다리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주전자를 꺼냈다. 물이 끓는 동안 나는 소파에 반쯤 늘어진 채 클락이 움직이는 걸 시선으로 구경했다.
생각해 보았다. 물어볼까? 그러나 클락이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을 즈음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물어보지 말자.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클락의 과거를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대단한 과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모든 건 별것 아닌 얘기일 것이다. 클락이라면 심드렁한 투로 별다른 감상도 없이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 줄 것 같았다. 대부분은 말이다.
물론 그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얘기들은 보통 하나의 사건 안에 파편처럼 흩어져 몇 가지 삽화로 군데군데 껴있는 법이다. 나는 클락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단어를 만드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얘기를 전개시킬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클락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고 조용하고 세련되게 언젠가 자신을 산산조각 냈던 삶의 파편들을 생략해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러한 시도들을 알아차릴 것이다. 곧이어 클락 역시 알아차릴 것이다. 내가 클락의 단어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데, 그가 그 상황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나는 그런 일들을 원하지 않았다. 비밀을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그의 자존심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다.
나는 클락에게 물어보지 않은 게 너무 많았다. 낙엽이 구르는 거리를 걸으며 클락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지금, 나는 깊게 후회하고 있었다. 클락이 갈만한 장소나 처한 상황 같은 걸 조금도 추측해 볼 수 없었다. 혹시 다른 일을 하러 간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가게를 열 수 없을 정도로 앓아눕는 바람에 고열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그의 안부를 물어볼 만한 가까운 친구의 존재도 몰랐다. 심지어 그가 가게에서 묵지 않을 땐 어디서 생활하는지조차 몰랐다.
클락을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난 클락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어째서 나는 그의 잡화점이 항상 열려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걸까. 의식적으로 자만하던 건 아니었음에도 설령 가게 문이 닫혀 있다 한들 나만큼은 거기 들어갈 수 있노라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락이 ‘CLOSE’ 간판을 걸고도 가게 불을 밝혀놓았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그도 가게에 앉아서 조금은 날 기다렸을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기는 했다. 아니, 이제는 모든 게 불확실했다. 넘겨짚거나 추측하는 걸 그만둬야 했다.
나는 클락이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게 언제였고 얼마 정도 그랬는지 떠올려 보았다. 일주일? 일주일이 조금 넘었던가? 그러나 보통 클락이 그런 식으로 가게를 비울 땐 단골들이 곤혹스럽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그러한 일정을 고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러자 ‘CLOSE’ 간판도 별다른 언질도 없이 사흘 넘게 가게 문에 닫혀 있는 이 상황이 다시 염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만하자. 나는 의식적으로 추측을 차단하면서 코트 깃을 여몄다. 어쩌면 일이 꼬이는 바람에 자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 것 같다. 게다가 네가 걱정해서 뭐 어쩔 건데? 맞는 말이다. 클락이 어디서 뭘 하고 있던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구두를 신은 다리가 서서히 저려왔다. 내일이면 뒤꿈치가 따끔거릴 정도로 부어오를 게 뻔했다. 오른팔에는 이미 쥐가 났고 위스키는 땅에 질질 끌릴 기세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지? 나는 정신을 차렸다. 마차를 타고 빌라로 돌아가야 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려고 한 건지 스스로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광장으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가운데 거리는 한산했고, 비둘기 몇 마리가 청동 분수대 근처에 모여있었다. 분수대 앞에서 꽃을 파는 여자아이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불현듯 멈추어 섰다. 정확히 말해 나를 사로잡은 건 여자아이가 아니라 그 곁에 서있는, 후리후리한 몸매의 때가 잔뜩 탄 머리카락을 비비 꼬고 있는 남자아이였다. 자세히 보니 남자아이의 뒤통수가 아주 낯익었다.
잠시 후 나는 남자아이가 누군지 깨달았다.
분별력 있는 몇 가지의 생각들이 나를 따라잡기 전에, 어느새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두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3
내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여자아이가 나를 경계하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옆에 선 꼬장꼬장한 차림새의, 오전부터 이른 오후까지 잡화점에서 일을 돕는 클락의 점원 꼬맹이는 곧바로 나를 알아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엇!” 하고 외치더니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케니스 씨!”
“안녕.”
내가 남자아이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미소를 짓자, 여자아이가 그런 내 사정을 다 꿰뚫어 본다는 것처럼 차가운 웃음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얘 이름은 팀이에요.”
“네 이름은 뭐니?”
“헤일리.”
“안녕, 헤일리.”
“케니스 씨, 이 주변에서 사시나 봐요?”
팀이 물었는데 아주 들떠 보였다. 그는 나를 좋아했고, 그래서 가게에서 가끔 마주칠 일이 있으면 지나칠 정도로 틱틱거렸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주 거리낌 없이 나를 대하고 있었다. 헤일리는 그런 팀을 약간 겸연쩍은 눈으로 흘겨보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가게가 문을 닫았더라.”
내가 슬쩍 물어보자 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요. 클락은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말 안 했는데.”
“뭐 하러 간댔는데?”
“그냥 잠깐 일이 있다고만 했어요.”
“무슨 일인진 얘기 안 했어?”
그러자 팀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늘 그렇죠, 뭐.”
“클락이랑 무슨 사이에요?”
헤일리가 물었다.
“친구야.”
팀이 내 눈치를 보며 나 대신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요?”
이제 헤일리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걘 원래 그래.”
내가 말했다.
“흐음, 그렇구나.”
하나도 납득하지 못한 투로 헤일리가 중얼거렸다. 그건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그 방식은 상대가 바라는 걸 주지 않으려고 시늉하거나 위협하는 것을 개의치 않을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나에게는 너무나 서투르게 느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나는 그 행동 속에서 헤일리가 무언가를 알고 있으며, 그 사실을 저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드러내고 싶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되레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잠깐 움직여줄까 고민하고 있었다.
“클락이 어디 갔는지 알아?”
“글쎄요.”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 건 처음이라 걱정되거든.”
그러자 헤일리가 깜짝 놀란 것처럼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아닌데. 전에도 일주일 정도 문 닫은 적 있는데, 모르셨나 봐요.”
“아아.”
나는 내가 충분히 멍청해보이길 바라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게. 넌 무슨 소식이라도 들은 것 없니?”
“너 왜 그래?”
보다 못한 팀이 헤일리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헤일리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쳐내고는, 곧이어 아차 싶은 기색으로 재빨리 내 눈치를 살폈다. 순간적으로 채신머리없이 굴어버린 자신의 행동을 방심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헤일리의 빈틈을 모른 척했다.
“클락이 무슨 말 한 거 없어?”
예상외로 이번에 헤일리는 자신을 흘끔거리는 팀을 내버려 두었다.
“저는 따로 들은 게 없어요. 사실 마지막 이틀은 일을 쉬었거든요.”
팀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다른 애들은 뭔가 들은 게 있을지도요. 이 근방 녀석들은 점심마다 잡화점에서 빵을 얻어먹거든요.”
“다른 애들?”
그러자 헤일리가 찰싹 팀의 손등을 때렸고, 팀이 펄쩍 뛰었다.
“아얏! 너 진짜 왜 그래?”
“저 여자한테 너무 많이 알려주지 마.”
헤일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너무하네. 상처받았어.”
잠깐이지만 헤일리는 나를 쌀쌀맞게 쏘아보았다. 다음 행동이 오기 전에 팀이 투덜거리며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분명 무언가 한 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위기가 흐지부지되면서 주의가 흐트러졌다. 팀이 우리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저녁 시간마다 애들끼리 모이는 곳이 있는데 가서 물어보실래요?”
“팀!”
“멀어?”
난 내 발 상태를 떠올리며 물었다.
“음, 먼가? 광장 빠져나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나오는 식료품점 뒷구역이에요. 멀어요?”
“아니.”
“그럼 같이 가실래요?”
“응.”
“넌 정말 얼간이야.”
헤일리가 짜증을 내며 툴툴거렸다. 결국 나는 헤일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그러자 헤일리는 아이들이 표정을 감추려고 할 때 흔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시선을 피하며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결심이 선 듯,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
“정말로 남편을 죽였어요?”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헤일리는 클락이 어디로 갔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 요컨대 내가 잠깐 누리는 척한 뒤 떠들썩한 가십들과 신문기사들 너머로 조용히 흘려보낸 짧은 약혼 생활에 관해 알고 있노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을 죽였다니…. 내가?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이 런던에 있던가?
“아무래도 그렇지.”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헤일리는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동요나 죄책감, 혹은 분노와 같은 격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지, 혹은 최소한 그런 흔적이라도 있는 건지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서 있을 뿐이었다. 아마 헤일리 눈에는 내가 허풍쟁이로 보였을 듯싶다.
헤일리가 마지못해 일어나더니 팔던 꽃을 신문지에 도로 싸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팀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돕는 대신 쭈뼛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는데, 괜한 짓을 하다가 면박 당하기 싫어서 그녀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약간 절뚝대며 두 아이들을 따라 광장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코너를 돌아서 식료품점 사이로 뻗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건물로 에워싸인 탓에 사방이 어두워졌고 바닥에서부터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쥐가 갉아먹다 만 짓무른 야채 조각이 구두 굽에 밟히는 게 느껴졌다.
골목의 아이들은 금속 재질의 녹슨 통을 뒤집어 세운 뒤 판자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조각들을 그 안으로 던져 넣으며 불을 쬐고 있었다. 그날 앉아있던 건 총 세 명이었는데, 눈으로 대충 훑어보아도 때때로 이것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였다가 흩어진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이 어수선하고 지저분했다.
한 아이가 나를 알아보고 “어?” 소리를 냈다. 고작해야 열두 살 남짓으로 보이는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애였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자리에서 뛰어내려 내 얼굴을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왔다.
“케이트?”
“케이트 맞아.”
헤일리가 새침하게 말하며 꽃다발을 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말에 이방인 어른을 경계하기 위해 심드렁한 태도를 꾸며대며 앉아있던 나머지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아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러는 동안 팀이 내 곁에 슬쩍 붙으면서 나를 보호하는 듯, 아니면 나와 친분이 있는 걸 작게나마 어필하려는 듯 모호하게 굴었다.
“뭐야, 여기 왜 왔대?”
“실물이 달라.”
“그래도 예쁜데.”
아이들이 한 마디씩 보태는 바람에 점점 주의가 산만해지자 팀이 목소리를 높였다.
“너네 며칠 전에 잡화점에서 무슨 얘기 못 들었어?”
“잡화점은 네 구역이잖아, 팀.”
빨간 머리의 남자아이가 킬킬거렸다.
“쟤 리 대신 우유배달해 주느라 이틀 빠졌대.”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말했다.
“리는 왜?”
“글쎄, 동생이 아프다나?”
“아무튼 잡화점이 왜 문 닫았는지 아는 사람 없어? 한 명쯤은 들었을 것 같은데. 너네 점심 얻어먹으러 안 갔냐?”
이제 팀은 툴툴거리고 있었다.
“원래 클락은 별말 안 하잖아.”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조용히 대꾸했다.
“맞아. 보통은 우리가 떠드는 거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지.”
빨간 머리의 남자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케이트는 왜 클락을 찾는대?”
곱슬머리의 남자아이가 나를 쳐다봤다.
“본인 말로는 친구래.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된대.”
의외로 헤일리가 나를 변호하듯 입을 열었다.
팀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은연중에 눈치 채곤 있었지만, 헤일리는 이들 사이에서 캡틴 역할을 맡고 있는 듯했다. 아이들을 훑어보던 헤일리가 독려하는 톤으로 다그쳤다.
“왜, 가게가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오래 문 닫는 건 거의 처음이잖아. 다들 뭐 들은 거 없어?”
“잘은 기억 안 나는데.”
빨간 머리의 남자아이가 우물쭈물했다.
“난 그때 먹은 수프 맛밖에 기억 안 나.”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히죽 웃었다.
“아, 그때 중간에 손님 왔었잖아.”
곱슬머리의 남자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 틈에서 일제히 “아아.” 하고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단골이었나? 클락이랑 친해 보였는데. 농담 같은 거 하구.”
“바보냐, 그거 존-존-존이잖아.”
“존-존-존?”
그때까지 쭉 입을 다물고 있던 내가 되묻자 아이들이 잠깐 떠드는 것을 멈추었다.
“클락 친구일걸요.”
빨간 머리의 남자아이가 크게 확신하지 못하는 투로 말했다.
“친구 맞아.”
“친구 아닐걸?”
팀이 끼어들었다.
“하여간에?”
나는 팔짱을 꼈다.
“음, 둘이서 뭔가 얘기를 했어요. 배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클락이 항구 상황이 어떤지 물어보고 그랬으니까….”
“그러고 보니 저 얼마 전에 항구에서 클락을 봤던 것 같기도 해요.”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말했다.
“뭐? 언제?”
팀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마도… 글피 전에?”
“야, 그걸 진작 말했어야지!”
팀이 그녀를 구박하는 동안 헤일리가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 말은, 클락이 배를 타고 나갔다는 소리야?”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꼭 그렇단 소리는 아니야. 클락은 가끔 물건 받으려고도 항구에 가잖아.”
“아냐. 배를 탔을 거야. 존-존-존이랑 대충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아.”
아이들이 쳐다보자 곱슬머리의 남자아이는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려는 듯 헛기침을 하곤 아까보다 큰소리로 몇 마디 덧붙였다.
“배편 얘기를 했거든. 클락이 존-존-존한테 물어봤어.”
‘씨씨가 배를 타고 나갈 일이 있나?’
나는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아이들은 이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야, 그러면 그렇겠네! 존-존-존은 항구 소식은 다 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배 타고 어디 멀리 나간 것 같지?”
“무슨 물건을 가지러 간 걸까?”
“청나라로 간 걸 수도 있어.”
“아무튼 돌아오려면 꽤 걸리겠네요.”
헤일리가 나를 바라보며 결론을 내렸다.
사소한 정보들이 아이들 입을 오르내리며 부풀려져 하나의 사실로 굳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나로서는 이 모든 추측들이 여전히 신빙성 없게 느껴지긴 했지만, 한편으로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아까 들은 이름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있었다.
“존-존-존이 뭐 하는 사람인데?”
“존-존-존은….”
빨간 머리의 남자아이가 말끝을 흐리자 곱슬머리의 남자아이가 말을 가로챘다.
“선원이었는데 지금은 술을 팔아요.”
“이스트엔드에서 네 번째로 싸움 잘하는 아저씨요.”
“베스널그린에서 살다가 지금은 항구 창고에서 살아요.”
“그런데 클락 친구인진 모르겠어요.”
팀이 소심하게 덧붙였다.
나는 더는 물어볼 기분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게다가 곧 저녁시간이었다. 아까부터 아이들 틈에서 작게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더는 그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마구잡이로 떠들기 시작한 아이들을 제지하며 잠깐 건너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디 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 수다쟁이 아이들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요? 여긴 우리 구역이거든요?”
헤일리가 투덜거렸지만 그렇게 불만스러운 투는 아니었다.
내가 빵과 차가운 햄 덩어리와 우유 몇 병을 사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내가 바닥에 둔 위스키 병을 돌아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나타나자마자 몰래 나쁜 짓을 저지르다 들킨 것처럼 흠칫하며 병을 내려놓긴 했지만, 저녁거리를 들고 돌아온 내 모습을 보고 죄책감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렸다.
나는 빵을 나누어준 뒤 구겨진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위스키 포장지를 주워들었다.
“왜 그렇게 큰 술병을 들고 다녀요?”
팀이 물었다.
“글쎄. 왜 그런 생각을 했나 몰라.”
나는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정육점에서 몇 푼 주고 얻어온 작은 칼로 덩어리 햄을 자르기 시작했다.
“칼을 잘 쓰시네요. 이런 거 못할 줄 알았어요.”
헤일리가 내 손을 보며 말했다.
“나이 먹은 인간들도 몇몇은 보기보다 유능하단다.”
내가 조용히 대꾸했다.
나는 아이들의 빵 위에 두껍게 썬 햄 슬라이스를 하나씩 얹어주었다. 아이들은 햄의 두께에 흡족한 나머지 나지막한 탄성까지 내질렀다. “우와, 햄이다!” “진짜 두껍다!”
내가 오물이 말라붙은 자리에 거리낌 없이 주저앉아서 빵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더니 입으로는 빵을 오물거리면서 눈으로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가 까탈스럽게 굴지 않는 게 의외였던 걸까? 아니면 내가 보기보다 자기들 생활과 훨씬 가깝다는 걸 감지라도 한 걸까? 잠시 후 나는 아이들이 빵을 우물거리며 불명확한 발음으로 던지는 질문들―“다리에 그 상처는 뭐예요?” “왜 잠깐만 하고 모델 일을 그만뒀어요?” “왜 잡지에서보다 덜 예뻐요?” “정말로 클락이 걱정돼요?”―에 심드렁하게 대답해 주고 있었다.
“노역장에서 일할 때 곡괭이에 찍혔거든.” “지루해서.” “글쎄. 주근깨 때문인가?” “응.”
그동안 나는 아이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통해 빨간 머리의 남자아이와 땋은 머리의 여자아이, 그리고 곱슬머리의 남자아이의 이름을 외웠다. 나중에 아이들이 나에게 다시 한번 소개하긴 했지만, 세 아이들의 이름은 커너, 미아, 그리고 콜린이었다.
배를 채운 아이들의 육신에 활기가 깃들면서 주변이 점점 더 산만해졌다. 아이들은 대화에 몰두하면서 나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렸다. 내가 자기들 사이에 껴있는 걸 더는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흥분에 찬 목소리들이 내가 모르는 골목의 사정들을 쏟아내면서 자기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는 걸까. 마지막 빵 조각을 입에 밀어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애들이란.
미아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남편 죽였어요?”
일순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마지막 빵 조각을 다 씹을 때까지 말을 아끼면서 생각에 잠긴 척했다. 그런 뒤, 내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건방을 떨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난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거든.”
아이들이 바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관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공포와 호기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내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입맛을 다시며 앉아있기만 해도 허공에 던진 동전처럼 금세 모양을 바꾸었고, 아이들은 아까 헤일리가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마음을 놓았다. 나는 색깔을 바꾸어 모습을 감추는 곤충처럼 굴면서 아이들이 던진 시험을 통과했다.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 커너가 내 허풍에 가세하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매듭짓는 과장된 우스갯소리를 했다.
“클락도 죽일 거예요?”
이제는 내가 동의할 차례였다. 아이들이 커너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 순간 갑자기 어린 시절의 클락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어느새 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나의 시선을 맞받아치던, 내 그림자가 드리운 소년 시절의 클락이 미소 짓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유혹할 수도, 위협할 수도 없고 도통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고집불통의 남자아이를 말이다.
“아니.”
내가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니, 걘 얼간이가 아니거든.”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을 느끼고 미끄러지듯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클락이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봐요.”
헤일리의 말을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뭘 어떻게?”
헤일리는 여태껏 내가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는 것에 성질이 난 것 같았다.
“존-존-존을 찾아가 봐요. 떠난 배들이 언제 돌아오는지 다 알아요.”
헤일리가 퉁명스레 말했다.
4
처음에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내가 왜?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클락이 배를 타고 나간 게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클락이 멀쩡한 가게를 내버려 두고 그렇게 멀리 나갈 이유가 있을까?
나는 클락을 미친 사람처럼 안달복달하며 찾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클락이 돌아왔을 때 평소처럼 태연하고 싶었다. 사실 그가 잠깐 좀 사라졌다고 해서 갑자기 내 일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 불안에 못 이겨 그를 찾아다녔다는 인상을 클락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돌아오긴 할 것 아닌가?
난 그저 여느 때처럼 클락의 가게에 들이닥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술병을 내려놓고 호기로운 미소를 짓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다 틀렸다. 골목의 아이들과 헤어져 빌라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나는 퉁퉁 부은 다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머리가 무거웠고 기분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뭘 하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다리를 주무르자 다 까진 발꿈치가 뜨겁게 부어 있는 것이 만져졌다. 나는 습관에 이끌려 멍한 표정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세면대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어제 신었던 구두가 현관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하루 종일 애물단지였던 위스키도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결국 나는 어제 구깃구깃해진 위스키 포장지를 바닥에 버리고 돌아왔다.
잠시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리하지 못하고 거실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두들겼는지 노크는 신경질적으로 변해있었고 빠르고 불규칙한 소리는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급하게 소리치면서 벗어둔 구두에 발을 집어넣다가 주춤거렸다. 뒤꿈치가 내 결정에 거세게 항의하고 있었다. 황급히 구두를 벗고 선반을 열었다. 굽이 낮고 통이 넓은 신발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동안 노크 소리는 쾅쾅거림으로 변했다. 나는 마음이 바빠져 구석에 있는 아무 신발이나 집어 들고 급하게 발을 욱여넣었다.
문 앞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허겁지겁 밖으로 나오느라 온 신경이 쏠렸다가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고 입에서 절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아래층에 사는 꼬맹이 남자애는 내 반응에 약간 언짢은 기색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요?”
“무슨 일인데?”
나는 구겨 신은 신발을 추스르면서 문밖으로 나왔다.
“1층에서 누가 부르는데요?”
아랫집 꼬맹이가 툴툴거렸다.
“누구?”
“몰라요.”
“남자?”
내가 되물었다.
“어떻게 생겼는데?”
“몰라요. 케이트를 찾는다는데요?”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내가 무슨 신발을 신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돌아가서 갈아 신고 올 새도 없이 빌라 현관에 모여 앉아있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골목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더니 쭈뼛거리며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나는 무심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었다. 어제보다 한 명 더 늘어서 여섯 명이었다. 새로운 멤버는 눈가에 주름이 깊어서 우울해 보이는 남자아이였는데, 내 눈에는 대략 열세 살쯤 돼 보였다.
클락일 리가 없다곤 생각했지만―걘 보통 나를 케이트라고 부르지 않으니까―얘네들일 줄이야. 내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내 빌라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어제 심심해서 따라와봤어요.”
팀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고해성사를 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문간에 기댔다.
“무슨 일인데?”
“새 소식을 입수했거든요.”
옆에서 커너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새로 온 남자아이가 엉거주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얜 제리고, 신문배달하는 애들 중 하나에요.”
헤일리가 대신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케이트.”
제리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조금 수줍음을 탔다.
“클락을 찾고 있다고 들어서요.”
나는 뭐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하나 싶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어제 클락이 주먹으로 뒷골목을 제패한 전직 선원과 밀거래를 한 끝에 청나라로 야반도주를 한 것까진 들었는데.”
그러자 아이들이 와르르 웃어댔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내가 돌아간 다음에도 소문을 돌리고 말을 부풀리면서 이 모든 상황을 자기들만의 탐정놀이로 전환시킨 것 같았다. 제리가 머뭇대며 말했다.
“저 그저께 클락을 봤어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항구 근처에서요.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걷고 있어서 금방 사라졌어요.”
“네가 잘못 본 거겠지. 배를 탄 거라니까.”
콜린이 투덜거렸다.
“아니야, 분명 클락이었어.”
“키 크고 까만 머리면 다 클락인 줄 알아?”
“진짜라니까.”
“다른 특별한 건 없었고?”
내 말에 제리가 어리둥절 되물었다.
“특별한 거요?”
“뭐, 아파보였다던가… 화가 난 것 같았다던가.”
나는 지나치게 걱정스럽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덧붙였다.
“내 말은, 걔 상태가 어땠냐는 거야.”
“글쎄요…”
제리는 말끝을 흐렸다.
“그런 상태였다고 해도 보기엔 잘 모를 것 같아요.”
‘그걸 왜 몰라? 딱 보면 알 수 있는데. 정말로 씨씨를 본 게 맞긴 한 거야?’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이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았다.
아이들이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탐정놀이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미아가 쭈뼛거리며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저, 케이트…. 뭔가 더 있는지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러 가실래요…?”
그제야 내 눈에 아이들의 꼬질꼬질한 옷매무새와 피로한 얼굴이 들어왔다. 특히 제리는 아까부터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흘끔대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어떤 말로 그를 꼬드겨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인지 알 만했다. 그렇다면 나도 눈치 있는 어른이 돼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난 돈이 남아도니까. 사실, 그것 말고는 더 가진 것도 없긴 했다.
“아니, 점심이나 먹자. 나 배고프거든.”
내 말에 아이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아이들을 이끌고 상점가 쪽으로 이동했다. 나는 구겨진 원피스 위에 아무렇게나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고, 지저분한 여섯 명의 아이들을 달고 있었다. 멀리서도 우리는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중산층이 몰려사는 챌코트의 특성상 체면을 중시하고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주민들은 나와 아이들을 대놓고 불쾌해 하지는 않았지만, 곁을 지나갈 때 반드시 흘끔거리긴 했다.
아이들은 이런 폐쇄적인 분위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바짝 긴장해있었다. 내가 샌드위치와 수프, 달콤한 설탕이 덕지덕지 발린 빵을 사주었을 때도 뛸 듯이 좋아하지 못하고 얌전하게 굴었다. 아이들은 이곳이 소란을 피우거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 적절한 동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길 가장자리에 일렬로 앉아 간식거리를 손에 쥔 아이들에게 말했다.
“거래를 하자. 난 꼬맹이들이 당연한 듯 내 집을 알짱거리며 찾아오게 되는 게 싫어. 그러니까 서로 볼일이 있는 것으로 하자고.”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입가에 설탕가루를 묻힌 채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영리한 헤일리만이 내 말을 알아듣고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좋아요. 뭔가 알게 되면 얘기해 드리러 올게요. 몇 명까지만 데리고 올 수 있는데요?”
“그건 상관없어.”
그렇게 말했다가 잠시 후 정정했다.
“온 런던 애들을 한꺼번에 데리고 오는 것만 아니면.”
“그 신발 남자 꺼 아니에요?”
미아가 어느새 내 구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발 사이즈에 맞지 않은 지나치게 헐렁한 구두라서 금방 알아본 것이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러게,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거나 신다 보니 그렇게 됐네.”
“남자랑 같이 살아요?”
“아니.”
“그럼 누구 거예요?”
나는 생각에 잠긴 척했다.
“뭐 다른 소식은 없니?”
하지만 늦었다. 내가 클락을 찾고 있다는 걸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헤일리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운데 다른 아이들 역시 저마다 시선을 주고받기 바빴다. 미아도 그 시선에 담긴 정보들을 읽더니 나를 향해 “아!” 하고 웃음기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지만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아이들은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면서 나를 향해 오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골치 아픈 일을 직감했지만 무엇을 수습하면 좋을지, 또 사실 무엇을 변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지나치게 행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네를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마.”
나는 아이들에게 확실히 말했다.
“씨씨가 놓고 간 구두인 건 맞는데,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정확히는 나에게 빌려주고 찾아가지 않은 구두였다. 아니, 아니다. 그냥 내가 돌려주지 않은 것뿐이다. 말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려있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헤일리가 대답했다.
“알겠어요.”
돌아가는 동안 아이들은 내가 신은 구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간에 커너가 마차에 오르는 귀부인의 사생활에 대한 익살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콜린은 그에 응하면서 건너편 이발소 주인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그러면 미아가 두 사람 사이에 있다고 여겨지는 숨겨진 아이에 대한 소문을 거론하는 식이었다. 매초 끊임없이 다른 이야깃거리로 주제를 옮기는 아이들의 수다를 듣고 있으니 괜한 말을 했나 후회가 몰려왔다. 나는 점점 더 바보같이 행동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도 와도 되죠?”
빌라 앞에 도착해서 약간의 조심스러움이 담긴 투로 헤일리가 물었다. 그런데 나는 말투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이 상황에서, 내 생각에 골몰하느라 그만 쏘아붙이듯 대답하고 말았다.
“마음대로 해.”
헤일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빌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나의 정신이 헐거워지고 있었다. 두 갈래로 나뉘어 조금씩 덜렁거리다가 결국 떨어져 나와 어느 쪽도 뚜렷하지 못한 두 개의 그림자가 되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걸 막아보려고 애쓰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현관 벽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두 손에 얼굴을 묻자 입에서 절로 끙 소리가 나왔고 약간의 매스꺼움이 올라왔다. 내 정신이 희미한 불빛처럼 깜빡이며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드나들고 있었는데,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나는 내 상태에 저항하려고 미약하게 애써보다가 무력하게 그 경계로 떨어졌다. 현관에 서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동시에, 어느새 나는 술에 잔뜩 취한 채 비틀거리며 캄캄한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휘청거리며 발코니로 향했다. 이 장면은 확실치 않다. 돌아가는 클락의 뒷모습을 구경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곧장 침대로 들어가놓고 꿈과 현실의 몽롱한 경계 속에서 의지를 실현했다고 믿으며 잠이 든 건지 아니면 정말로 발코니로 향했던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과거를 서성이는 내 반쪽짜리 정신을 육신 쪽으로 당겼다. 눈앞이 핑 돌았다가 서서히 시야가 돌아왔다. 나는 두 손에 묻었던 얼굴을 떼어내면서 생각의 시제를 바로잡았다. 과거는 기억의 고랑 속으로 흐르게 내버려 두고, 오로지 이 순간만이 현재가 되도록 했다.
모든 혼란이 끝났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나는 현관을 지켰다. 잠시 후, 나는 클락의 신발을 벗었다.
몸을 씻고 커튼을 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얕게 잠들었다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주사기를 든 채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거나 맨몸으로 발코니에 서서 새까만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건 내게 견딜 수 없는 희열과 공포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초저녁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 헤일리가 여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빌라 앞에 나타났을 때도 나는 조금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헤일리는 여전히 가게 문이 닫혀 있고 클락의 행방은 오리무중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쨌든 새로운 목격담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아이들 두 명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름을 외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두 아이들이 해리와 캠버튼이라 불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헤일리와 미아, 커터, 콜린, 해리와 캠버튼을 데리고 상점가로 가서 저녁거리를 사주었다. 주민들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다 귀찮은 듯 굴었다. 거리에 일렬로 앉은 아이들은 디저트를 떠먹으면서 내게 전리품을 자랑하듯 앞다투어 새로운 소식들을 들려주었다.
이 근방 골목 아이들 사이에서 클락의 행방에 대한 소문은 이제 손쓸 도리 없이 부풀려지고 있는 듯했다. 다들 잡화점에게 한 번쯤 점심을 얻어먹은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이 일에 개인적인 호기심뿐 아니라 약간의 애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임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됐던 아이들의 사고와 시야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추측들이 내게 별반 도움이 안 된 건 사실이다.
어떤 아이들은 그를 항구에서 보았다고 주장했다. 날짜나 시간이 제각각이었지만 몇몇 얘기들은 그럴싸해서 믿어봄직한 구석도 있었다. 또 어떤 아이들은 그가 마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는 걸 봤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다른 아이들―클락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주장하는 무리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클락이 배를 타고 나갔다고 주장하는 무리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점점 더 구체적인 정보를 사방팔방 끌어모으는 중이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가장 컸다. 배를 타고 나갔다는 얘기는 수많은 추측들 중에서도 가장 상상력을 가장 자극하는 얘기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이들에 따르면, 클락은 며칠 전에 ‘앤-듀어링슨’이라는 화물선에 올라탄 것으로 돼있었다.
그러나 클락이 느닷없이 멀쩡한 가게를 두고 사라질 리 없었다. 그가 배를 타고 나갔으리라는 추측에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나는 차라리 클락이 마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는 소식이 훨씬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들 클락이 교외까지 나갈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그러다 생각을 고쳤다.
모르는 일이지. 그에게 내가 전혀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서운해할 수 없는 클락의 타고난 기질이었다. 나는 클락을 감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어떤 부분은 결코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이 들려주는 그에 관한 진술에조차 빈 곳이 있었다. 모두가 그에게 비밀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렇게 흥분하는 것이다.
나는 배를 탄 클락의 뒷모습이나, 마차에 오르는 클락의 옆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좁은 시골길을 걷거나 어두운 밤거리를 서성거리는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모든 장면들이 어색함 없이 딱 들어맞는 듯했다.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도 무언가 사정이 있겠거니 여겨야만 하는 사람. 클락이 가진 공백에는 강제적인 합의가 담겨있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여기까지라고. 찾아 나서지 말라고. 행방을 물으러 쏘다니거나 얼간이같이 굴지 말자는 합의가.
그가 가진 비밀을 원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내가 바보같이 굴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언제나 그러지 않았나. 나는 사실 클락의 비밀 같은 건 원한 적 없지 않았나.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클락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몰랐을 리 없다.
카드게임 같은 것이다. 패를 감춰야만 이기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일들을 해왔다. 굳이 서로일 필요조차 없었다. 런던은 아름다운 시궁창이었고, 거리와 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애송이에서 출발했다. 우리의 능력은 희망을 가지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와 대화를 나눌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원점에서부터.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던 순간부터.
나는 클락에게서 살아남고 싶은 걸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확신하는 건 이제 그가 감춘 패를 뒤집는다고 이길 것 같지가 않다는 거다.
얼굴을 찡그린 커너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며 물었다.
“클락은 뭐하러 배까지 타고 나간 걸까요?”
“씨씨는 배를 타고 나가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지만 저번보다 확신은 없었다.
“그러면 마차를 타고 나간 걸까요?”
미아가 물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뭐 하러 거기까지 간 걸까요?”
“뭐. 거기 사는 친구라도 만나러 갔나 보지.”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그의 성의를 종용할 친구가 나 말고 더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면 돈 먹고 튄 누군가를 잡으러 갔는지도 모르고.”
이건 좀 그럴싸한 추측이다. 그러면 좀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
“언제쯤 돌아올까요?”
콜린이 물었다.
“그런 일이라면 일주일 정도는 걸리겠지.”
그런 다음, 나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처럼 되물었다.
“지금 얼마나 지났지?”
“닷새요.”
헤일리가 대답했고,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을 했다.
“그럼 이틀 뒤에는 오겠네.”
하지만 그 말은 내 희망 사항에 가까웠다.
골목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 나는 빌라로 돌아와 책을 몇 페이지 읽었다. 내일도 아이들이 찾아올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는 골목 아이들이 진심 어린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한편으로 간식거리를 얻어먹기 위해 중간중간 말을 꾸며대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히 불만스러운 건 아니었다. 지루했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지루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빌라 앞을 어슬렁거릴 수 있도록 명분을 허락해 준 건 나였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뒤꿈치의 붓기는 거의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커튼을 살짝 걷어서 한산한 거리를 확인했다. 헤일리가 매일 찾아오겠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오늘은 오지 않을 수 있었다. 골목 아이들도 저마다 하는 일이 있었다.
고민 끝에 옷을 갈아입고 거리로 나왔다. 발을 조이지 않는 구두를 신었는데도 걷는 동안 뒤꿈치가 살짝 욱신대는 게 느껴졌다. 정처 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익숙한 골목길에 들어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봐도 영업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잡화점에 가까워지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가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이제는 저 문으로부터 느껴지는 고집과 폐쇄성이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저 문을 제외한 거리의 나머지 통로들은 존재감이 희미할 정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곳에 잡화점이 있는 줄조차 모르는 것처럼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지루해서 미쳐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클락은 정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아이들을 조금 더 들들 볶아서 그가 머무는 공동주택이나 아파트의 위치를 수소문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그렇게 해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은 곳곳에서 클락을 목격할 수는 있어도 그를 둘러싼 구체적인 정보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클락은 아이들의 입을 타고 온 런던을 돌아다닐 수 있을지언정 생활감을 가지고 실존하는 인물처럼 한구석에 붙박여있지는 못했고, 그래서 아이들이 들려주는 클락에 관한 온갖 뜬소문들은 결과적으로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내일은 돌아오겠지. 대충 일주일째니까.’
하지만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나쁜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에 걸렸거나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가 운 나쁘게 떨어지는 벽돌 같은 걸 맞고 쓰러졌는지도 몰랐다. 길가는 누군가에게 시비가 걸리는 바람에 한바탕 싸우다가 패거리 싸움에 휘말려 골목 안으로 끌려가버린 걸 수도 있었다. 항구 근처와 런던 북동쪽에선 그런 일들이 흔하게 벌어지지 않는가.
갑자기 온 런던이 지리멸렬한 소동의 온상지로 변했다. 어디선가 클락이 피를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만하자.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둬야 했다. 그러나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이성을 누르면서 온 신경이 곤두섰다. 정말로 클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느새 나는 잡화점으로부터 뒷걸음질 쳐 반대편으로 걷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걷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의 목적은 너무나 뚜렷했고 행선지는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젠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존-존-존을 찾아야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클락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 하는 걸 조금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점점 더 혼란한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 느꼈다.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면 거짓말을 사용할 수 없다. 나 자신에게조차 사용할 수 없다. 내 능력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게 어떤 파국을 불러올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5
항구에 가까워면서 바닷가 짠내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뱃고동이 수평선을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순간부터 내 옆을 지나치는 이들은 전부 지치고, 혈색이 좋고, 덩치 큰 남자들뿐이었다. 항구는 혼란한 남자들의 세상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나는 항구 입구를 넘는 순간부터 허리를 곧게 펴고 남자들 틈에 섞여 들었다.
본능에 가까운 태도였다. 내가 자연스럽게 인파에 섞여 들거나 순식간에 상자 뒤로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에 항구를 돌아다니는 남자들 대부분이 내가 여자라는 것을 쉽게 인식하지 못했다. 이따금 나를 깨닫고 흘끔거리는 남자들도 있긴 했지만 내가 말을 붙이거나 휘파람을 불어볼 상대가 아닌 걸 알고 금방 흥미를 잃었다. 다들 일을 하느라 바빠서 주변을 살필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이 무질서하게 쏟아냈던 몇 가지 정보를 토대로 길을 찾아냈다. 창고로 이어지는 골목을 걷는 동안 생선 비린내가 물씬 올라왔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나무 삭는 냄새를 풍기며 바닷바람에 천천히 썩어가는 창고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문이 활짝 열린 것이 있는가 하면 단단히 잠겨서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하나하나를 다 뒤져보기에는 지나치게 막막해 보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존-존-존이 어떻게 생긴지 몰랐다. 심지어는 그의 진짜 이름도 몰랐다.
나는 겸연쩍은 태도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문이 열린 가장 가까운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서 생선을 굽고 있던 세 명의 남자들은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랐다.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다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태연한 표정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웃는 걸 멈췄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누구. 남편?”
한 사람이 물었다.
“아니. 존-존-존.”
“존-존-존? 그게 뭔데?”
남자들이 킬킬거렸다. 그들의 반응을 보니 존-존-존이 항구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호칭이 아니라 골목 아이들만이 부르는 별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게 될 것 같았다. 힘겨운 날이 될 것이다.
“이름만큼 자주 불리는 걸로 아는데. 정말 몰라?”
“어떻게 생겼는데?”
나는 아이들이 말해준 얘기를 되짚기 시작했다.
“선원이었고. 지금은 술을 팔고. 음, 이스트엔드에서 네 번째로 싸움 잘하고.”
말할수록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베스널그린에서 살다가 지금은 창고에서 먹고 잔다고 하고.”
“그런 사람이 한 둘이야?”
남자 하나가 툴툴거렸다.
“모르면 말고.”
내가 자리를 떠나려는데 한 사람이 나를 붙잡았다.
“당신 그런데 케이트야?”
나는 그를 뿌리치며 고약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오해 많이 받아.”
바로 옆 창고는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는지 확인한 뒤 다음 창고로 이동했다. 문이 비스듬하게 열린 세 번째 창고에는 노년기에 접어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하나가 시가를 태우며 발주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존-존-존을 아냐고 물어보았다.
“존 조나스?”
그는 내가 설명하는 뜬구름 잡는 얘기들을 유심히 듣더니 말했다.
“배에서 내려서 물장사를 하는 놈이 없진 않아. 하지만 존이란 이름은 너무 흔해, 아가씨. 내가 아는 존만 해도 셋이나 돼. 그래도 싸움을 잘 하는 놈으로 꼽자면 존 조나스야. 악력이 좋아서 손잡이를 여럿 부쉈거든.”
“그 사람이 어딨는지 알 수 있어요?”
“글쎄, 한동안 안 보이던데 또 어느 창고에 박혀 있겠지.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구만.”
그가 보여주는 호의적이고 성의 있는 태도 앞에서 나는 잠시 갈등했다. 클락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케이트를 보았다던가, 클락을 찾으려고 어떤 여자가 돌아다니는 중이라던가 하는 얘기를 퍼뜨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항구 근처 잡화점 말인데요.”
나는 은근하게 얘기를 꺼냈다.
“며칠째 문이 닫혀 있는데 가게 주인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아시는 거 없어요? 이 주변에서 봤다던데.”
남자는 시가를 재떨이 없이 바닥에 바로 털었다가 다시 훅 하고 빨아들였다.
“어떻게 생겼는데?”
“까만 머리에 키는 이만하고. 머리는 여기까지 오는데 보통 반 정도 묶고 있고. 얼굴은… 좀, 성질 더러워 보이고.”
나는 얼굴을 매만지며 표정을 만들었다.
“눈썹은 이렇고. 코는 이렇게 돼있고. 입은 이렇게 웃는데.”
남자는 심드렁하게 연기를 뱉어냈다.
“그런 놈이 한 둘이어야지.”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문이 열린 오른쪽 창고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한 무리의 남자들이 화물을 옮기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문 뒤에 숨어서 그들이 일을 마치고 다시 창고를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화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안쪽의 좁은 상자 틈으로 다리가 삐져나와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잔뜩 취한 남자가 재킷을 얼굴 끝까지 덮고 코를 골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빈 맥주병들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한 상태인 걸 알았다. 나는 멈칫했다. 클락이 입던 재킷 중에도 저런 게 있지 않았나?
잠깐 갈등하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가까이 몸을 숙이자 남자가 재킷 속에서 흠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나는 재킷을 걷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 클락이 아니었다.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는 이런 데서 술을 진탕 퍼마시고 잠들 사람이 아닌데 왜 그런 의심을 했을까.
재킷을 도로 덮어두려는데 어느새 남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결에 부스스 뜬 눈이 나를 올려다보며 몇 번 깜빡거렸다. 나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태연하게 재킷을 그의 위로 덮어두었다. 그러나 억센 손이 나를 붙잡았다. 남자가 나를 휙 잡아당기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그 위로 엎어졌다. 코를 찌를 듯한 술 냄새가 훅 끼쳐올라 왔다. 나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곧장 그와 거리를 벌렸다. 남자는 이제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었다. 코에 걸린 재킷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털퍽 하고 떨어졌다. 그가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쥐면서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자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샜다.
공포심보다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른 한 손으로 그의 턱 아래를 가격할 생각으로 주먹을 쥐었다. 이십 대 초반에 종종 골목 안으로 끌려갈 뻔한 뒤로 나는 남자를 주먹으로 갈겨 제압하는 법을 배웠다. 침착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잠깐 정도 판을 바꿀 수 있었다. 나는 눈앞의 남자를 죽어라 팰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간에 누군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정말로 그를 박살 내버렸을 것이다. 등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뛰어들더니 눈앞의 남자에게 정면으로 주먹을 날렸다. 술에 취한 남자가 욕지거리를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동안 등 뒤에서 “괜찮으세요?” 하고 묻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날 휙 잡아당겨 창고 밖으로 이끌었다.
모든 장면이 한순간에 휙휙 지나갔다. 어느새 나는 창고와 창고 틈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에 서 있었다. 나를 도와준 남자는 내 손목을 붙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골목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앳된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고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때까지도 흥분 상태였던 나는 나를 구해준 손길에까지 분노를 느끼고 있던 것이다.
내가 손을 뿌리치자 베레모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시 한번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내가 창고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도둑인가 싶어 따라 들어갔다가 그 불상사를 목격했노라고 했다. 나더러 대체 뭘 하려고 했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하는 멍청한 짓을 다 보았다.
“사람을 찾고 있었어. 덮고 있는 재킷이 내가 찾는 사람이 입던 거랑 비슷했거든.”
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거 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베레모는 많은 감상이 담긴 투였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누굴 찾는데요?”
나는 클락 얘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빙빙 돌아보기로 했다.
“존-존-존.”
“존-존-존?”
나는 베레모에게 존-존-존에 대해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듣던 베레모가 특정한 인물을 연결 지었다.
“존 해리슨 씨를 말하는 건가?”
아까와는 다른 이름이었다.
“그 사람을 존-존-존이라고 불러 사람들이?”
“그건 아닌데… 선원 일을 그만두고 술 밀거래를 하는 사람은 맞아요. 여기 사람들이 거의 다 베스널그린 출신이라 거기서 살았다는 건 별 대단한 특징도 아니고요. 싸움을 잘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뭐, 잘 하지 않을까요? 밀거래까지 하는데.”
“창고에서 살아?”
“보통 물장사로 밀거래하는 사람들이 그렇죠.”
“어느 창고?”
“뒤쪽 라인이요.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낼 거라 정확히 어딘진 모르겠네요. 누굴 찾을 거면 뒤쪽만 훑어봐요. 앞쪽은 수시로 화물이 들락거려서 사람 지낼 곳이 못 돼요. 아까처럼 술 취한 사람들이나 반나절 누워있다 가는 정도죠.”
베레모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혼자서 온 거예요?”
대답 대신 손목을 문질렀다. 베레모가 고개를 저었다.
“항구에 오래 있지 않는 게 좋아요. 저희 누나가 이런 데 혼자 돌아다니고 있으면 전 기절할걸요.”
“뒤쪽 라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진데?”
그러자 베레모는 잠깐 고민하더니 손바닥을 펼쳐서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두 라인만 둘러보면 돼요. 대충 여섯 채 정도 되겠네요. 문이 닫혀 있으면 자물쇠가 걸려있는지 보세요. 걸려 있으면 오랫동안 안 쓰인 거예요.”
베레모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찾아가서 뭘 하려고요? 존 해리슨 씨가 아까 그놈 같은 놈팽이는 아니지만 성가신 일은 반기지 않을 텐데. 무엇보다 여자랑은 거래 안 할걸요.”
“아니,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 뒤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항구 잡화점이 오래 닫혀있더라. 언제 열리는지 알아?”
“씨씨네 가게요?”
베레모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뭐, 거긴 워낙에 닫혔다 열렸다 하니까. 어제도 붕대 살 일이 있어서 찾아갔더니 닫혀 있더라고요? 이 주변에 거기 말고 잡화점은 없으니까 뭘 사고 싶으면 나가셔야 할 거예요.”
나는 갈등했다.
“가게 주인을 알아?”
“조금? 왜요?”
“거기 주인이 배를 타고 나갔다고 들었거든.”
그만해, 케니스 리드. 나는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베레모의 말은 나를 완전히 강타했다. “아!” 하고 탄식한 베레모가 중얼거렸다.
“그럼 그게 그때 배를 탄 거였나?”
“배를, 정말로 탔다고?”
나는 믿기지 않는 것처럼 되물었다.
“왜?”
베레모는 자기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내가 동요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음, 언제였지? 화물선으로 올라가는 걸 봤어요. 그런데 그게 배를 타는 거였나? 그냥 물건 내리는 건 줄 알았는데.”
이쯤 되자 베레모의 머릿속에도 내가 지나치게 캐묻는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베레모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존 해리슨 씨한테 물어보려는 게 그거예요?”
“아니…. 그 건은 다른 거야.”
나는 사근사근 말하면서 시선을 흘렸다. 고개를 비튼 채 묘한 각도로 그를 응시하며 지그시 눈을 마주치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베레모는 내 태도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하하, 재밌군.
“슬슬 가야겠다. 네가 알려준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부드럽게 말하며 베레모의 손등을 살짝 건드리자 그가 불에 덴 듯 흠칫 손을 뒤로 빼냈다. 어쩔 줄 모르는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그가 등 뒤에서 물어왔다.
“혼자 다니실 거예요?”
나는 베레모를 돌아보았다. 그는 완전히 얼빠진 얼굴이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진심 어린 투로 말했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좁은 골목길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해가 기울어져 창고마다 길게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얼마 뒤면 해가 저물 것이고 저녁이 되면 어둠도 금세 찾아오리라.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나는 베레모가 설명해 준 방향을 따라 창고 뒤쪽 라인으로 이동했다.
뒤쪽으로 이어지는 창고들은 전부 문이 닫혀 있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나는 베레모의 충고를 떠올리며 자물쇠가 걸린 창고들이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보았다. 두 채를 제외한 네 채 모두 자물쇠 없이 그저 문만 닫혀 있었다.
아까의 불상사 때문에 창고로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다. 하지만 앞서 베레모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클락은 정말로 배를 타고 나간 것일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왜? 대체 무슨 이유로? 존-존-존이라면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내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고통스러운 가정과 호기심을 안고 체중을 실어 닫힌 창고 문을 열었다. 나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등 뒤로 문이 쾅 닫히자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나무 벽 틈으로 새어 나오는 햇빛이 눈에 익을 때까지 나는 한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나 창고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바닥에 건초더미 같은 것이 드문드문 널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곧장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고요한 주변에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네 채의 창고를 전부 둘러보았다. 나중에는 작게 “존-존-존?” 하고 부르며 노크를 하거나 안쪽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창고는 하나같이 텅 비어있었다.
머리 위로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한 직후부터 내내 긴장으로 곤두서있던 탓에 팔다리가 뻣뻣하게 느껴졌다. 뒤꿈치도 다시 저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실망으로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빌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더는 찾아다닐 엄두도 안 났다.
깊은 패배감을 느끼며 부둣가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지친 발걸음으로 짜증스럽게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케이트!” 하고 불렀다. 내가 돌아보자 콜린은 소리치는 걸 관두고 나에게 달려왔다. 가까이서 보니 콜린은 길쭉하게 말아 놓은 종이 같은 걸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심부름이나 배달을 하는 와중에 나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한 듯했다.
“여긴 혼자 무슨 일이에요?”
“누굴 좀 찾는다고.”
이제 나는 평상시처럼 웃지도 못했다.
“클락 말고요? 누구요?”
콜린이 어리둥절 되물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떠올렸다.
“혹시 존-존-존이요?”
그놈의 존-존-존. 나는 화가 나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대체 어디 사는 누구야? 진짜 이름은 뭔데?”
“창고에 없어요? 아까도 봤는데.”
“없어. 하루 종일 찾아다녔거든?”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무작정 돌아다닌 건 나의 미련함인데도 피곤과 짜증에 못 이겨 으르렁거렸다.
“이름은 왜 그런 식이야? 뭐 어떻게 생겼는데?”
“그야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말끝을 흐리던 콜린이 나를 쳐다봤다. 내 지친 행색과 몸짓을 이제야 발견해낸 것 같았다. 종일 항구를 헤매며 헛걸음이나 한 나의 엉망진창 하루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고민하던 콜린이 잠시 후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지금 찾아가 봐요. 어차피 저 다시 창고로 가야 돼요.”
온몸에서 힘이 쪽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콜린이 얼빠진 나에게 옆구리에 낀 종이 뭉치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이거 존-존-존 거거든요.”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6
콜린이 나를 데리고 향한 곳은 아까 나를 좌절시켰던 인적 드문 창고 네 채가 늘어선 바로 그 구역이었다. 그런데 콜린은 자물쇠가 걸리지 않은 닫힌 문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콜린은 오렌지색으로 녹슨 자물쇠가 걸려있는, 도무지 최근까지 사용된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맨 좌측 창고로 향했다. 그러더니 문을 두들기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존-존-존!”
문 너머에서 대답이 없자 아까보다 거칠게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콜린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가 달려오면서 문을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녹슨 자물쇠가 문에서 뚝 떨어졌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내 발끝에 맞고 멈췄다. 자물쇠의 이음새 부분이 다 삭아서 떨어져 나간 것이 보였다. 그것을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뭐야?”
퉁명스러운 인상의 흑인 중년 남성이 우악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곱슬머리를 짧게 깎았고 입에는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그는 막 자다 깬 것 같았다. 화가 나서 표정을 구긴 게 아니라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콜린을 알아보고는 표정을 풀었고, 그 옆에 선 나를 발견하자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콜린이 내내 들고 있던 말아 놓은 종이를 존-존-존에게 건네면서 나를 소개했다.
“케이트 벨이에요!”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상기시켜주는 콜린의 태도에 조금 머쓱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인사를 건넸다.
“그쪽이 존-존-존인가요?”
그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입에 문 파이프를 손으로 옮기더니 허리를 숙여 바닥을 구르는 녹슨 자물쇠를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문고리에 다시 교묘하게 걸어두었다.
“들어와.”
문을 닫으면서 그가 말했다.
창고 안은 어두웠지만 제법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낡아서 가죽이 너덜너덜하긴 해도 아직까진 쓸만해 보이는 사인용 소파도 있었다. 가운데에는 불을 지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장작이 그 주변에 무질서하게 쌓여있고 한가운데에는 재가 수북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쪽에 먼지를 뒤집어쓴 술통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콜린이 동전을 받고 자리를 떠난 뒤, 존-존-존은 소파에 기대면서 다리를 쭉 뻗었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어색한 분위기였다. 나는 의자에 앉다가 책상에 눈길을 주었다. 책상 위 편지 봉투에 크게 존 헥스라고 휘갈겨져 있었다.
“존 조나스나 존 해리슨일 줄 알았는데.”
존-존-존은 파이프 안에 담뱃잎을 눌러 담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뭐든 상관없어.”
그래서 난 그를 그냥 존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존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곤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댔다.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뿜으며 그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래서…. 케이트 벨이 비린내 나는 항구 창고엔 무슨 일이신가?”
하루 종일 그를 찾아다녔다. 그가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도 나는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시선을 흘리며 허공을 쏘아보았다. 한참 뒤에 결국 입을 열었다.
“혹시 그쪽이라면 클락 캄벨의 소식을 알고 있나 싶어서요.”
“캄벨?”
“잡화점 주인이요. 며칠째 닫혀 있는.”
“아니, 그건 알지. 그런데 아가씨가 왜?”
심장에 박힌 독침 같은 질문이었다. 나는 홱 고개를 돌려 존을 쏘아보았다.
“친구거든요.”
“아하.”
존은 입맛을 다시더니 파이프 안의 담뱃잎을 보충하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나는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존은 얄미울 만큼 느긋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파이프를 빨아들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걸 물어보려고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뭔가?”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걔의 다른 친구를 몰라요.”
그 말에 존이 낄낄거렸다. 나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클락이 배를 타고 나갔다는 소리가 있던데, 정말인가요? 들리는 얘기로는 떠나기 전에 당신이랑 배편 얘기를 했다던데.”
“우리야 늘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있지. 장사를 하는 입장이니까.”
하지만 그런 대답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씨씨가 정말로 배를 타고 나갔어요?”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아.”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존이 덧붙였다.
“내 말은, 아가씨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캄벨이 그런 녀석이라는 얘기야. 배를 타고 나갈 일이 있으면 나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 얘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는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아가씨도 모르지는 않잖나.”
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로 모르는 건가요. 조금이라도?”
존은 난처해보이기도 하고 성가셔보이기도 했다.
“그 녀석은 평소랑 똑같았어.”
“그날 한 배편 얘기는요?”
“그날…. 언제를 말하는 건가?”
“일주일쯤 전이었을 거예요. 당신이 점심 즈음 잡화점에서 클락이랑 그런 얘기를 나눴다고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아아. 핸더슨호를 말하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핸더슨호…. ‘앤-듀어링슨’호에 대해선 뭐 아는 거 없어요?”
존은 고민하는 듯 턱을 문질렀다.
“그런 배는 없어.”
“열흘 단위로 항구를 들락거리는 화물선이라고 하던데요.”
“그래, 그게 핸더슨호야.”
“그렇지만….”
“꼬맹이들한테 들었나? 글자 읽을 줄 아는 녀석들이 드물어서 배에 적힌 것만 읽을 땐 그렇게 꼭 실수를 하지. 다음번에 만나면 어떻게 읽는지 가르쳐줘. 한 번 알려주면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내 관심 밖이었다. 이제 내 머릿속에선 클락이 핸더슨이라고 적힌 화물선에 오르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행방에 개연성이 갖춰지고 있었다.
“항구에서 일하는 어린 남자애가 클락이 화물선에 탔다는 얘기를 해주더군요. 그거, 핸더슨호였을까요?”
나는 베레모의 얘기를 조합해 보려고 했다.
“캄벨이 그 배랑 자주 거래를 하긴 할 거야. 타고 나갈 만한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배는 어디로 가나요?”
“사정에 따라 달라. 거래 규모가 크진 않아서 보통은 차로 운반하기엔 거리가 있는 교외 쪽 공장에서 뭘 좀 가져오는 정도지. 그렇게 큰 배가 아니거든. 그래도 가끔 프랑스까지 나가기도 하고.”
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클락이 왜 거기까지 나갔을까요?”
“캄벨이 거기까지 나갔다면…. 글쎄.”
고민하던 존이 어깨를 으쓱였다.
“배를 탔는지 어쨌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찌 알겠나?”
나는 존에게 무언가 더 물어보고 싶었다. 다른 것들. 이를테면 클락이 가게에서 지내지 않을 땐 주로 어디서 머무는지, 만약 지금처럼 보이지 않을 때는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을 것 같은지. 근래에 클락을 본 적은 없는지, 그의 다른 친구들은 누가 있는지, 그의 소식을 물어볼 만한 다른 누군가가 당신 외에는 더 없는지…. 그러나 말은 입속에서 헛돌았고 어느 선까지 지켜서 질문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존은 나를 돌려보낼 생각인 것 같았다. 창고 벽 틈으로 노을이 완전히 지고 있는 바깥을 흘끔거린 뒤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지나치게 낙심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존이 내게서 어떤 욕망을 읽어낸 건 아마 그 표정 때문인 듯싶다. 그는 내가 내일도 찾아오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올 거면 오후 2시는 넘겨서 오도록 하게. 점심엔 바쁘니까. 오늘은 딴 소리 그만하고 돌아가고.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게 없어.”
침울함을 감추려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던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항구를 빠져나와 챌코트로 돌아오는 동안 날이 완전히 저물어 거리는 금세 깜깜해졌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지만 원래부터 성격이 그런 데다가 다른 생각에 잠긴 탓에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다가 클락의 구두를 보았다. 그의 구두는 벽 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다. 구두는 차가운 냉기를 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구두를 주워들었다.
그날 우리는 술에 취해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잔뜩 하면서. 우리는 이제 잡화점에서 술을 마시는 버릇이 들었지만, 그날은 내가 사겠다고 졸라서 고급 레스토랑에 끌고 갔었다. 클락이 정장을 입고 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클락이 낯설게 보이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의 칼라를 장난스럽게 빼내면서 이죽이던 내 얼굴에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다 드러났으리라.
거리가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는 걸었다. 나는 레스토랑을 빠져나올 때부터 조금씩 휘청거리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는 완전히 술기운이 올라있었다. 내가 절뚝대자 클락이 몇 번 정도 걸음을 멈추었고, 그러다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구두를 벗어주었다.
그날 클락은 맨발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 손에 내 구두를 든 채로 말이다. 이제는 몇 달도 전의 일이다. 그 후에도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구두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날 신었던 내 구두는 그의 잡화점 2층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언젠가 거기서 그것을 본 적 있었다.
가끔 이 모든 일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그런 문제를 오래 고민하지 않으려 했다. 파고들면 귀찮아지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은근하게 말을 돌리거나 행동을 바꾸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위 없던 것처럼 굴었다. 나는 클락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런 쪽이 더 특별해 보였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휘둘리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악을 지르는 여자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에게 한없이 시시한 여자가 돼버릴 것 같았다. 나는 클락이 거쳐왔을 다른 여자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날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해버릴까 봐 못 견디게 두려웠다.
그를 특별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일이 있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클락 캄벨을 특별히 여겼다. 현관의 어둠 속에 서서 이제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 돌아온 클락이 오늘 내가 벌인 일들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한순간 걱정으로 돌아버리는 바람에 분별없이 사방팔방 들쑤시고 다녔다. 우리의 카드게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 패를 흘리면서 멍청하게 굴고 말았다.
그런데 클락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걸 그가 알게 될 바에야 그냥 죽는 게 나았다.
나는 클락의 구두를 선반 구석에 조용히 밀어 넣고 비틀거리며 거실로 향했다. 현관에 있던 걸 언제 치워둔 건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위스키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쏘아보다가 겉옷을 허물처럼 벗어던지고 속옷 차림으로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힘없이 베개에 머리를 눕히며 생각했다. 내일은 올까? 하지만 고통스럽게도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일도 항구를 가로질러 그의 행방에 단서를 흘려줄 존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정말로 바보 같은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존이 클락에게 아무 말 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항구에서 만난 모든 남자들이 내 존재를 잊어버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하지만 모든 것이 내 통제 바깥에 있었다. 그가 사라진 뒤로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다음 날 나는 어제보다 눈에 덜 띄는 색깔의 코트를 걸치고 항구로 향했다. 점심시간을 갓 넘긴 항구는 활기가 넘쳤다. 인적이 드물었던 창고 뒤쪽 구역으로까지 간간이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다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존의 창고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 존이 그랬던 것처럼 녹슨 자물쇠를 문고리에 교묘하게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존은 어제와 달리 멀끔한 차림이었다. 면도를 했고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손에 든 파이프는 그대로였지만 담배를 태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던 듯 문이 열리자마자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오셨군.”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등을 기댄 채로 비스듬하게 섰다. 그제야 존이 나를 돌아보았다.
“거기 내내 서있을 텐가?”
“아뇨.”
“그럼 좀 앉게.”
나는 너덜너덜한 가죽 소파를 바라보았다.
“클락의 소식을 알만한 다른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존은 불도 안 붙은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몸에 밴 습관인 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항구에서 캄벨과 친분이 있는 녀석들이 나 말고도 몇 있긴 하지. 하지만 별 소득은 없을 거라 장담하겠네. 아마 나보다도 모르겠지. 개중엔 직접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은 놈들도 있고. 안 앉을 텐가?”
나는 부스럭거리며 따뜻한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피시 앤 칩스에요.”
“마침 출출했는데 잘 됐군.”
존이 테이블을 소파 앞으로 끌어와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감자튀김을 소극적으로 뒤적이는 동안 존은 에일 향이 은은하게 밴 대구 튀김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먹고 있으니 술 생각이 났다. 술 생각을 하니 클락이 떠올랐고 그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클락이 풀럼 쪽으로 마차를 타고 갔다는 얘기가 있어요.”
“음.”
존이 칩을 와삭거렸다.
“캐닝 쪽이라면 모를까, 헛소문이군. 아니면 아예 교외로 나가거나.”
“교외….”
“또?”
딴 생각에 빠지려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간 항구에서 클락을 봤다는 아이들이 많아요. 지어낸 것들도 있었지만 그럴싸한 것도 없진 않았는데, 근래에 정말 본 적 없어요? 들은 얘기라던가.”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겠군. 없어. 항구에 돌만한 얘깃거리도 아니고.”
“그럼… 항구 외에 클락이 갈 만한 데 아는 거 없어요?”
“글쎄. 여기서 말고 캄벨이랑 만날 일이 있어야 말이지.”
“당신 친구라면서 아는 게 없네요.”
그러나 내 투덜거림에도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조금 있으면 심부름꾼들이 올 거야. 꼬맹이들이 무슨 소식이라도 물어오길 기다려보게.”
아이들이 창고 문을 두들겼을 때, 나는 존에게 체스를 배우고 있었다. 턱을 괸 채 지루한 표정으로 다리를 떨면서 아무렇게나 말을 옮기는 데도 존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내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나는 중간중간 일어나려고 했다. 초조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어째서 존이 체스를 제안했는지 알 것 같다. 그는 내가 항구 거리로 뛰쳐나가 아무나 붙잡아 세우고 클락에 대해 물어보게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해서 나나 클락, 더 나아가 존 자신에게 어떤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내가 스스로를 통제할 시간을 마련해 주려 한 것이다. “아니. 난 그저 심심했을 뿐이야.” 정작 존 본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말이다.
심부름꾼 아이들은 이미 아는 얼굴들이었다. 골목 아이들은 내가 창고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 나를 만났던 콜린만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케이트. 새로운 소식은 건졌어요?”
“아니.”
“저희는 뭔가 좀 가져왔어요.”
그러자 옆에서 팀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케니스 씨, 클락이 정말로 배를 타고 나갔대요!”
나는 의자에 앉아있는 존을 돌아보았다. 나는 아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면서 뒤로 물러났다.
“들어와서 말해.”
콜린과 팀, 커너는 우르르 들어오자마자 마구잡이로 얘기를 쏟아냈다.
“저희가 아는 형 중에 찰리라고, 배에서 물건을 실었다 내렸다 하는 일을 하는 형이 있는데요. 어제 그 형을 만났거든요. 그래서 물어봤는데, 그 형이 클락을 확실히 봤다고 하는 거예요.”
“그 형은 거짓말 안 해요. 그 형 말이면 확실해요.”
“찰리가 그러는데, 자기가 일주일 전에 클락이 핸더슨호를 타고 가는 걸 똑똑히 봤대요. ‘앤-듀어링슨’호가 아니라 핸더슨호였어요. 클락이 자주 입는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대요. 배에 이렇게 기대어 있었다고 했어요.”
커너가 벽에 툭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는 포즈를 취했다. 나는 존을 흘끔거리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일주일 전이라고?”
“여드레 전일 거야. 핸더슨 호가 그때 나갔지.”
존이 봉투 속 감자튀김을 뒤적이며 말했다.
나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클락이 배를 타고 나가면서 다른 얘기는 없었어?”
“배 타고 나가는 모습만 멀리서 본 거라 직접 말은 안 해봤대요.”
흥분에 찬 세 소년들이 클락이 배를 타고 어디로 나갔을지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상상력은 로체스터, 그레이스, 레인험과 같은 가까운 교외 지역을 맴돌다가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넘어 청나라로까지 뻗어나갔다. 존은 한동안 아이들이 추리에 흠뻑 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존은 편지와 잡동사니, 서류 같은 것을 세 아이들에게 배분한 뒤 베스널그린 어딘가로 추정되는 위치와 장소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은 다 알아듣는 듯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 거리를 받은 아이들이 발 빠르게 흩어지면서 소리쳐 인사했다.
“내일 봐요, 케이트!”
“빌라 앞으로 가도 돼요?”
“애들한테 오늘은 여기 있으니까 찾아가지 말라고 말해둘게요!”
아이들이 왁자지껄 돌아간 뒤 나는 문을 닫았다. 존이 테이블을 치웠다. 내가 문고리를 붙잡고 한동안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핸더슨호는 이틀 뒤면 돌아와.”
나는 절망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존은 내 얼굴을 확인하곤 테이블을 마저 치웠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긴 침묵이 있었다. 존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내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잠시 후 존이 체스판과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를 챙겨 일어났다. 한 손에 맥주병을 든 채였다.
“바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면 몇 판 더 하자고.”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문을 나섰다. 나는 의자를 들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창고 뒤쪽에 좁고 냄새나는 길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의자를 추스르면서 걸었다. 존의 등만 보고 걷다 보니 어느새 방파제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탁 트인 공간에 도착했다. 사람이 겨우 둘이나 앉을까 싶을 만큼 좁았다. 존이 테이블을 세우고 그 위에 체스판과 술병을 올렸다. 나는 하얀 거품을 사방으로 튀기며 부서지는 파도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의자를 내려놓았다.
그곳에서 체스를 다섯 판 정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딴 생각에 빠져서 자꾸 지기만 했다. 애초에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존이 나를 어떻게 참아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역시 게임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으리라. 중간부터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몇 달 전에 했던 포커가 떠올랐다. 나는 체스판의 말을 옮기는 동시에 내 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어느새 내 맞은편에 클락이 앉아있었다. 창문으로 땅거미가 지면서 잡화점 2층이 차차 어둠에 잠겼고 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천장과 바닥을 에워싸면서 사물마다 펑퍼짐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패를 돌리던 손이 멈춘 것도 이 무렵이다. “잠깐만.” 아래층에 손님이 와서 클락이 일어난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 나는 탁자로 손을 뻗는다. 그의 패를 뒤집어보려는 손이 꼭 남의 것처럼 보인다.
치사하게 게임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원래부터 술에 취하면 나는 그런 식으로 농담을 만들었다. 그의 패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면서 판을 엎어버린 뒤 낄낄거리며 그의 표정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클락의 자리 건너편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램프가 놓인 선반 뒤쪽으로 희끄무레한 어둠이 고여 있었다. 그 속에 내 구두가 놓여있었다.
클락이 돌아왔을 때, 나는 의자에 몸을 젖힌 채 천장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취했어?”
“아니.”
그런 뒤에 나는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취한 것 같기도.”
“안 취했네.”
클락이 자기 패가 제자리에 있는 걸 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가 의자를 끌고 자리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을 앞으로 쭉 뻗으면서 허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숨을 들이쉬며 그림자 속으로 나를 집어넣으려고 할 때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클락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램프 불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커튼처럼 요동쳤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알아차렸을까? 제 발 저렸다. 어디까지 알아차렸을까? 중요한 건 우리가 거의 동시에 무언가를 알아차렸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패는 여전히 진실을 감춘 채 탁자 위에 엎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아래로 클락의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내 차가운 발바닥 아래에 그의 발등이 놓여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는 익숙한 방향으로 사고하려고 애썼다. 정신을 집중하려고 발버둥 쳤다.
‘자세를 고치고 제대로 앉아. 멍청이처럼 굴지 마.’
그러나 촘촘하게 다져왔다고 믿었던 단어의 그물망은 그곳에 없었다. 단어의 세계를 가르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래된 세계의 주인이 내 안에 있었다. 이제는 다 틀렸다. 무엇이든 탄로 나고 말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마저도. 혼돈의 세계에서 온 내가 이제 그만 클락의 발등 위로 네 발을 내려놓으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 순간에 놀랍게도 나는 인내한다. 그것은 나의 능력이었다. 순발력 있게 충동과 욕망을 감추는 인내심으로 모든 것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겁에 질렸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 뒤를 상상할 수 없었다. 클락의 반응을 조금도 상상해 볼 수 없었다.
클락이 도통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기고 싶어서 자꾸만 무언가를 걸게 되면 결국에는 정직할 수밖에 없게 되는 순간이 왔다.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아주 어린 시절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러나 은연중에는 감지하고 경계해왔던 그만의 진짜 능력이었던 것이다. 나를 정직하게 만들 수 있기에 나를 치명적으로 상처 입힐 수도 있는 클락 캄벨. 나는 끝없이 의심하리라. 그의 손에 칼을 쥐여준 게 다름 아닌 나였으니.
나는 이 게임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클락이 가게 문을 닫고 내가 빌라로 돌아가는 일 따위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이 게임에 이미 너무 많은 걸 걸어버렸다. 그런데도 그의 패를 뒤집기 위해 아직까지 걸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가 두려웠다.
나는 클락의 발등 위에 맴돌던 발을 치우고 패를 집어 들었다. 혼돈의 세계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욕망과 고통을 대변하는 어둠이 단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경계가 닫히면서 단어의 그물망을 촘촘하게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나의 두려움이 승리를 맛보며 나의 의식을 재구성하고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을 법한 통제 가능한 미래를 가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느새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하다가 곯아떨어질지도 몰라.”
내 말에 클락이 투덜거리며 카드를 도로 주워들었다.
“너 설마 내 소파를 빼앗을 생각은 아니지?”
클락이 어느 정도는 날 봐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어떤 부분을 눈감아주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매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간다. 그가 사라지기 며칠 전에도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매번 좋은 술을 들고 왔다. 그것이 기가 막힌 명분인 것처럼 굴면서. 그놈의 위스키를 들고 사방팔방 거리를 쏘다니기 전부터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그게 얼간이 같은 생각이라는걸.
존이 내 왕을 쓰러뜨렸다. “체크메이트.” 바닷바람이 세차게 내 이마를 때렸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려놓고 수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체스에 재능이 없었다. 나는 그저 속이거나 감출 수 있을 뿐이다. 카드게임이 하고 싶었다. 그가 필요했다. 템스 강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항구의 파도 속으로 비밀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길 바라며 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 애가 날 떠났으면 어쩌죠?”
존은 죽은 말을 다시 체스판 위에 세웠다. 남은 하나까지 다 세운 다음 술을 들이켰다.
“배는 이틀 뒤면 돌아와.”
술병을 비운 다음 그가 말했다.
7
핸더슨호가 돌아오던 이튿날에는 먹구름이 껴서 날씨가 흐리멍덩했다. 거리에 약간 안개가 껴있었고 바람이 차가웠다. 날씨 때문인지 눈을 떴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 체중을 실어 이마를 짓누르는 듯 머리가 끔찍하게 무거웠다. 뒤척이면서 몸을 일으키자 눈이 좌우로 휙휙 돌았다. 며칠 동안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팔방 쏘다니느라 몸이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마친 뒤에도 오랫동안 거울 앞에 앉아있었다. 신경 써서 구두를 고르고 나가기 직전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위스키를 챙겼다.
거리를 걷는 동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등 뒤편에서 무거운 진자가 천천히 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자는 오른편으로 크게 기울어졌다가 왼편을 향해 곤두박질치면서 작게 훙 하는 소리를 냈다. 진자가 떨어지며 만드는 바람이 내 등을 떠밀었고 운명이 귀 뒤편에 붙어서 예감을 속삭였다. 나는 점점 더 빨리 걷다가 정신을 놓쳤다.
내가 클락 캄벨의 잡화점에 도착했을 때 거리는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정신을 빼놓고 있는 와중에도 거리가 지나치게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 아이들이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공중으로 종이가 흩날렸다. 나는 닫힌 잡화점 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웅웅거리는 세계 저편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팀이 정신없이 신문을 흔들며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팀의 입속으로 이어지는 캄캄한 구멍을 보았다.
“케니스! 케니스! 케니스!”
빨간색과 까만색이 왔다 갔다 드나들었다.
“배가 가라앉았어요! 핸더슨호가 가라앉았어요! 도버에서 가라앉았대요! 화물도 못 건졌대요! 탄 사람들이 다 죽었대요!”
말보다 진자가 먼저 내 정중앙을 관통했다. 밀려나온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허벅지를 따라 흐르며 바닥을 적셨다.
나는 멍하니 바닥을 확인했다. 피가 고여서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니다. 이건 위스키였다. 내 손에서 병이 미끄러진 것이다. 산산조각 난 병에서 터져 나온 위스키가 사방에 흰 거품을 만들고 있었다.
깨진 주둥이에서 흘러나온 위스키 한 줄기가 기울어진 도로를 향해 천천히 흐르는 장면이 보였다. 불현듯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저기서부터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지? 아무래도 거리가 두 개로 분리된 듯했다. 비록 내가 서 있는 쪽에선 피할 수 없는 시간의 급류가 긴박하게 흐르고 있지만 반대편에는 위스키 줄기가 언젠가 도로에 닿아 마침내 항구를 향해 흘러가는 미래를 충분히 그려볼 수 있을 만큼 느리고 여유로운 시간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위스키가 닿을 것이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걸어가서 그곳에 멈추어 섰다. 그런 다음 팀을 바라보았다. 팀이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장들은 내 귓가에 닿지 않고 흘러갔다. 모든 단어가 본연의 뜻에서 분리되는 중이었다. 결국 모든 사건들은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내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갈 것이다. 내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위스키가 내 걸음에 맞추어 도로를 따라 흘러갔고 속삭임이 그를 뒤따랐다. 나의 단어들은 머리통 뒤를 스쳐 지나가며 암울하게 속삭였다. 그림자가 눈앞을 일렁이며 휙휙 움직였고 사물들은 수시로 모습을 바꾸었다. 머리를 꽉 죄는 감각이 나를 붕 띄워 올렸다.
걷던 중에 내 심장을 두고 온 걸 깨달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도로 주워왔어야 했는데. 그러나 어디서 떨어뜨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뒤돌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추어 섰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떻게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리를 벗어나 새로운 시간의 흐름에 진입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직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뒤돌아 원래 방향대로 걷기 시작했다.
위스키가 내 옆을 흐르고 있었다. 나는 위스키보다 빠르게 걷지 않으려고 걸음을 늦췄다. 남들 눈에는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새로운 시간의 흐름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었다. 중요한 일이란 지루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
사는 게 그렇다. 모두들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다들 가슴에 구멍을 안고 살아간다. 공허하니까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벌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태껏 지루하다는 말을 잘못 사용해왔다. 용례가 엉망진창이다. 공허함이야말로 삶의 독이었다. 생기를 빼앗고 의지를 지배하는 힘이었다. 그 힘이 나를 옥죄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내내 공허했다. 나는 공허한 인간이었다. 이제는 피할 길이 없었다. 아니, 너무 느리게 걷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달려야 할 때였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이 휙휙 지나갔고 내 몸과 부딪칠 때마다 욕지거리를 날렸다.
가게 문이 닫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한순간도 몰랐다. 클락이 날 떠날 수 있을지언정 영영 사라져버릴 가능성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설령 영영 문이 닫히게 된다 한들 그 너머에 클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물어봤어야 했다. 뭐가 됐던 다 물어봤어야 했다. 그의 비밀을 지켜주는 척하면서 내 자존심을 지키느라 모든 게 끝났다. 가슴을 후려치는 고통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클락 캄벨, 어딨어?
나는 천천히 거리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나를 추월해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빠르고 강력한 삶의 급류가 거리에서 밀려나와 영혼을 떠밀며 벌써 저만치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흐느끼듯 고개를 숙였다.
감히 미래를 안다고 생각했구나, 케니스 리드! 삶이 무서운 줄 잊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삶이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를 것이다. 결국 모든 사건들과 함께 흘러가고 말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에 비할 바에야 그 애가 나를 상처 줄 수 있다는 가능성과 맞서는 고통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깟 상처 정도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거였다. 정말로 그깟, 상처 정도는….
얼마나 그곳에 주저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울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것도 같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어느새 나는 일어나서 또다시 걷고 있었다. 주변 풍경이 이글거리며 일그러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클락의 잡화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내 구두를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구두가 아직 거기 있을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어느새 속삭임이 내 어깨에 앉아있었다. 코너를 돌아 벽을 짚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잡화점 문이 열려 있었다.
클락은 잡화점에 있었다. 그는 물건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얼빠진 얼굴로 가게에 들어선 나를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 그때까지 한순간 너무 큰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극심한 충격을 받고 휘청거렸다.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심지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클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꼴이 그게 뭐냐?”
나는 힘겹게 소파를 짚고 중심을 잡았다. 무언가 말해보려 했지만 단어 몇 가지 만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신음처럼 입술 사이로 말이 새어 나왔다.
“어디 갔었어?”
나는 겁에 질려 속삭였다.
“너 대체 어디 갔었냐고?”
“어디 갔었냐니….”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클락이 중얼거리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억지로 숨을 골랐다.
“나, 네가, 배에 탄 줄 알고….”
“배?”
“왜 아무 말도 없이 간 거야?”
나는 이제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다고.”
“또 쓸데없는 생각했네. 그런 일이 벌어지기야 하겠냐?”
클락이 피식 웃자 내가 벌컥 화를 냈다.
“왜 벌어질 수 없다고 생각해?”
나는 소리쳤다.
“그런 일이 왜 우리만 비껴갈 거라고 생각해? 너 네가 그렇게 대단한 것 같아?”
클락이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는 거냐고! 왜 이러는 것 같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내가 걱정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거야? 널 걱정할 거라고 정말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나를 걱정했다고?”
“당연하지! 어디 가면 간다고 말 정도는 하고 갔어야지. 이 거지 같은 개자식아! 네가 없어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선택 앞에 있었다. 나를 감추기엔 너무나 하찮은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이 머리가 아닌 혀 끝에서 조립되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없어서….”
중얼거리는 순간 나는 볼품 없어졌다.
“지루해서 미쳐버릴 뻔했어….”
클락은 잠깐 말이 없었다.
“아, 그러셔.”
그가 살짝 빈정거렸다.
“난 네가 심심할 때 찾는 오락거리다 이거지.”
“그래. 영광으로 알아.”
내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클락이 웃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고마워해.”
“그래, 고맙다.”
클락이 킬킬거렸다.
“근데 너 나를 그렇게 기다릴 필요까지 있냐? 심심풀이가 나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설마 잘난 케니스 리드가 그런 것 하나 못 만든다고 하진 않겠지.”
그는 시비를 건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 대화가 성가셔질 걸 짐작하고 마무리를 지으려는 거였다. 나를 배려한 것이기도 하고 그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늘 그렇듯이. 갑자기 못 견딜 것 같았다. 속삭임이 머리 뒤편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단어의 그물망 하나하나가 뜯겨져 나가면서 시제가 혼란에 잠겼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뒤엉키고 있었다. 소파에서, 거리에서, 불 꺼진 차고에서, 술집에서. 스프링필드의 차가운 2층 방에서, 남자들이 가득한 항구에서, 거짓말로 가득 찬 챌코트와 그의 잡화점을 잇는 좁다란 골목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던 나는 단어를 몰랐다. 내게는 두 가지 자존심이 있었다. 어둠은 비밀을 감추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만들어 놓은 마음 뒤편에 있었다. 힘없이 중얼거리는데 눈물이 고였다.
“그런 거 없어….”
혼돈을 관통하며 말이 왔다. 다음 순간 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다른 사람 같은 거 없어, 한 번도 없었어! 널 기다렸단 말이야, 널!”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에 놀라 그대로 멈추어 섰다. 시간이 멈췄다가 한순간 쏟아져 흘렀다.
잠시 후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8
한참 걷다가 뛰다가 했던 것 같다. 얼마나 그랬는지 어디를 헤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챌코트와 항구를 잇는 골목 곳곳을 왔다 갔다 헤매었으리라 생각된다. 비틀거리며 정처 없이 움직이다 보니 빌라 근처였고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렸을 땐 부둣가를 걷고 있었다.
시제가 점점 더 뒤죽박죽 섞이는 중이었다. 나는 방파제 옆을 걷는 동시에 스프링필드 앞마당에 있었다. 나는 철제 계단을 오르는 동시에 나무를 올랐다. 창고에서 누군가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 고아원에서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내 발은 맨발이다가 클락의 신발을 신었다가 다시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계절은 봄이었다가 겨울이었다가 다시 가을로 바뀌었다.
나는 왜 도망치고 있는 걸까? 나무 위에 앉은 내가 대답한다. 그야 씨씨에게 그런 소리를 했으니까. 네가 네 패를 다 까버렸잖아. 어린 나는 책을 거꾸로 든 채 여유를 부린다. 그래서 더는 주고받을 게 없어서 게임이 끝난 거야. 너는 그게 무서운 거야. 게임이 끝나면 씨씨랑 뭘 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모든 것이 내 억지였다. 나는 클락의 적수였던 적 없다. 그는 나와 승부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 그는 그런 것들에 크게 관심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적수로 세웠기 때문에 그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척해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왜 그여야만 했을까. 나 역시 꼭 클락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다른 아이가 포커를 이해했더라면 나는 그 애를 특별히 여겼을 것이다. 그가 내 마지막 상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상대를 찾아 떠날 수도 있었다.
나는 잡히는 대로 아무 모퉁이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눈 뒤편이 뜨거웠고 눈동자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시야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오른쪽으로 쏠렸다가 왼쪽으로 이동했다. 나는 토할 것처럼 허리를 수그렸다가 잠시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었다. 나는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것은 클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잡화점에 찾아올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그를 위해 문을 열고 기다렸으리라. 우리는 때마침 서로의 변덕에 어울려줄 만큼 지루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머리 위로 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가 습하고 무거웠다. 나는 창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시에 나무에서 뛰어내려 스프링필드 앞마당에 착지했다. 나는 공책을 들고 있었다. 클락이 마당에 엎드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는 동안 앞마당은 잡화점으로 변했고 그는 어느새 소파에 앉아있었다. 내가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그는 내 손을 잡아당겼고 우리는 저녁 늦은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가 날 한 바퀴 돌리는 바람에 시야가 휙 돌았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고 보니 거리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상자를 안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느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폭죽을 만들어야겠다. 클락을 조르면 그는 마지못한 것처럼 굴면서도 결국에는 즐거워하리라. 비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변덕이 그를 즐겁게 한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의 변덕을 사랑하는 것처럼.
천둥이 치면서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내가 고른 단어에 놀라 입을 틀어막고 멈추어 섰다. 거센 바닷바람이 나를 후려치고 빗방울이 내 뺨을 할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 길을 알고 있었다. 수십 번도 걸었던 길이다. 그의 잡화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어느새 나는 돌아가고 있었다. 점점 빠르게 걷던 다리가 뛰기 시작했다.
너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야. 시시해. 너 춤출 줄은 알아? 난 네가 뭐든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과거가 내 앞에, 미래가 내 뒤에 놓여 있었다. 정신없이 뛰는 내 몸으로 말들이 관통하며 흘렀다. 우린 그때 아무것도 걸 게 없었어. 눈치 없고 상냥한 대답하고 눈치 빠르고 상냥하지 않은 대답 둘 다 말해줘. 클락으로 하루 종일 나쁜 생각만 할 거야. 사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원하는 비밀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를 원했다. 천둥이 치면서 머리 위로 폭죽이 날아갔고 천장에 구멍을 만들었다. 빗방울이 내 정수리를 적시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엉망진창의 얼굴로 클락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 말고 입을 맞춘다. “사랑해.” 그러나 닿지 않는다. 날씨 좋은 저녁 우리는 거리에서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돈다. 그의 손을 붙잡아 당기고 말한다. “사랑해.” 그러나 닿지 않는다. 누구나가 곧장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하고 단순한 단어를 오랫동안 멸시했다. 나의 공허함을 외면하기 위해 너무 많은 단어를 남용하며 살아왔다. 나는 한없이 가벼울 때만 말을 사용했다. 별 볼일 없는 상대들에게 마음을 내주는 척하면서, 사랑해. 공허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단어 너머의 세계가 필요했는데 이젠 그것을 붙잡을 능력이 없다. 다 보여주고 싶어도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다. 선택할 수조차 없었다. 사랑해. 같이 있고 싶어. 변덕스럽고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불꽃처럼 빠르게 타오르고 지는 찰나의 환희일지라도. 삶이란 게 결국 다 그런 것일지라도. 그러나 마음들은 미끄러져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아무 말도 선택할 수 없다. 씨씨에게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돌아갈 수 있을까? 클락 캄벨의 이름 뒤편에 너무 많은 것을 두고 왔다. 그것이 나를 떠밀게 했다. 나를 솔직하게 했다. 나를 상처 입힐 용기를 내도록 했다. 그의 공허를 사랑했다. 그의 비밀을 사랑했다. 그를 사랑했다. 더는 그에게 아무것도 될 수 없을지라도 그를 원했다. 의미가 있기를 바라며. 단지 우리가 거쳐온 수많은 단어가 올바른 의미를 찾기를 바라며. 그런데도 삶이 계속된다니. 그 단어들이라니. 아, 단어. 그 단어들. 아아. 그 단어들!
빗방울이 내 눈에 고여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나는 울고 있었다. 항구를 빠져나와 챌코트의 거리를 가로질러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남자들의 세계를 지나 거짓말쟁이들의 거리를 달려 항상 가고 싶어 했던 그곳으로. 어째서 이토록 원하는데도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밖에 도달할 수 없을까. 그런데도 네가 보고 싶어. 거짓말을 다 써버린 지금에도. 가져갈 명분이 없어도. 내가 결국 시시한 여자애에 불과할지라도. 그래도. 그렇게 생각 안 하면 안 돼? 나는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 영혼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어둠 속을 헤매도록 두었다. 단어가 그물망에서 떨어져 나와 혼돈 속에 잠기도록 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나를 관통해온 모든 과거와 미래와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저지를 선택에 상처받을 결심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초라한 사람으로 있게 두었다. 그런 다음 멈추어 섰다.
잡화점은 문이 닫혀 있었다. 가게 안쪽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몸을 떨면서 가게 앞에 다가가 섰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문을 두들겼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을 때 나는 다시 겁에 질려 있었다. 말과 어둠이 들끓고 속삭임이 내 발치에 깔렸다. 빗방울이 뺨을 적시고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 동안 나는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의 발등에 내 발을 얹는 것처럼, 그의 시선 위에 조용히 내 시선을 내려놓았다. ■ <words, words, words>
안녕하세요 디디님.. 즐거운 봄날 보내고 계신가요..? 중간부터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고록입니다.
시그널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지인왈 "갑작스러운 고백은 공격이야") 요즘 들어서 님에게 북치고 장구쳤는데 어땠을진...?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벼르고 벼르다 2월 초에 시작해서 드디어 끝맺네요.. 이 글을 님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쁩니다. 즐겁게 읽으셨을까요?
저.. 쓰는 동안 이래저래 사건을 만들다 보니.. 얘네 봇계 싹싹 긁어다 로그 훑어보면서 설정을 맘대로 가져왔는데요.. 혹시 캐붕 있으면 진짜진짜 괜찮으니까 편하게 디엠/카톡 주세요!!! 이 로그의 부제는 <노노 and 케니스의 업보 갚기> 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스필이 엔딩난지.. 얼마나 됐을까요.. 4년? 하하... 4년 전 커뮤친구한테 고백하기? 아무래도 전 미쳤나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씨씨를 사랑해요.. 당장 답은 못 주실 것 같아서 yes no 만 먼저 알려달라고 아래에 폼 만들어놨음
▶▶ https://naver.me/5snLUFhk ◀◀
창 닫기 전에 제출하고 가세요.
얘네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어요. 상상하도록 허락해주시겠어요?
님이랑 노는 게 즐거워요. 언제나 그렇답니다.. 차이면.. 차인대로 또 재밌게 놀 수 있지 않을까요?
글 아래에 삽입된 일러스트는 톰토리나 님의 커미션입니다. 예쁘죠 ㅋ 씨씨가 예쁘게 나와서 좋아함
여유 생기시면 또 이렇게 저렇게 놀아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